추수 감사절, 추수 감사 주일, Thanksgiving Sunday입니다. 농경시대를 살고 있지 않으니, ‘추수’라는 말이 그리 와닿지 않습니다. 그래서 소홀히 넘어가기 쉬운 교회 절기입니다. 그래서 ‘추수’라는 그 말을 빼고 생각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감사절, 혹은 감사 주일. 그러나 여전히 감사라는 단어가 걸립니다. 머리로 생각해 입으로 말하기는 쉬워도 가슴으로 느껴 입으로 고백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내가 뭘 감사해야 할까? 감사라는 것은 내가 무엇을 받았고, 그리고 그것이 내 손에 쥐어져 있고, 그래서 그걸 보니 정말 나에게 필요했고, 내가 갖고 싶었고, 내가 정말 원했고 그래서 마침내 내 손에 있어 고맙게 느끼고, 고맙게 여기고, 그래서 그 고마움을 말하고 전하고 표현하는 것인데. . . 나는 그럼 무엇을 원했고, 그래서 지금 그 무엇이 나에게 있을까? 그런데 나에겐 그것이 없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없는데, 있다 해도 굳이 누구에게 고맙다고 감사를 말하고 표현하고 전할 필요는 없어 보이는데. 왜 교회는 꼭 이맘때면 추수 감사절이다 뭐다 해서 없는 감사, 감사, 감사를 말할까? 딱히 받은 것도 없고, 딱히 감사할 것도 없는데. 왜 나는 교회는 자꾸 감사를 말하고, 은혜를 말할까?
저 혼자 자라는 나무는 없고, 저 혼자 크는 새도 없는데. 저 혼자 자랐고 저 혼자 컸다는 누구 집 자식을 보며 동네 어르신들은 꼭 한 말씀 하십니다.
“쯧쯧, 저런 철 없는 것 . . .”
그러나 철 없는 것을 따지면 애나 어른이나 매 한가지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자주 있습니다. 사실 ‘감사’라는 단어는 어버이날, 스승의 날, 누구의 생일날, 그리고 연말연시 연하장 카드의 문구, 그것도 이미 인쇄된 채로 있는 글자로나 있을 뿐,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해 잊혀지고 사라져 가는 중에 있는지 이미 오래입니다. 모든 것이 나의 실력과 능력에 좌지우지된다고 믿는 세상이고, 운도 나의 실력이고 능력이라고 우기는 세상입니다. 부잣집에 태어난 것도 나의 실력이고 능력이고, 똑똑하고 배운 부모에게서 태어난 것도 나의 실력이고 능력이다 하는 참 뻔뻔하게 변한 세상입니다. 분명 아닌 것 같고 아니다 하는데, 누구는 그리고 세상은 자꾸 그렇다고 우깁니다. 심지어는 그게 진리라며 가르칩니다. 내가 몰라 그렇지 세상을 그렇다고, 내가 아직 그 나이 먹도록 세상 물정을 모르고 순진하다고.
그런데 그런 말을 자주 하는 사람들을 가만히 보면 그래서 그런지 누구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잘 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미안하다는 말도 잘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스럽게도 어떤 때나 상황에서는 감사하다, 미안하다, 죄송하다는 말을 잘해도 너무 잘합니다. 도가 지나칠 정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게 정말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그런 감사함이나 미안함이 아니라는 것을 다 압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그것 역시 실력이고 능력이라고 합니다. 없는 감사, 없는 미안도 할 줄 알고, 나아가 남들이 정말 감동적으로 그리고 진심처럼 느끼게 하는 것이 정말 실력이고 능력이라고 합니다. 이런 정도면 도저히 당해낼 재간도 없고, 굳이 이겨먹고 싶은 맘도 생각도 사실 없습니다. 그냥 그러려니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하지 않는 사람, 미안해 하지 않는 사람, 실력과 능력만을 말하는 사람이 그래서 점점 무서워집니다.
“14 시간이 되어서, 예수께서 자리에 앉으시니, 사도들도 그와 함께 앉았다. . . 17 그리고 잔을 받아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말씀하셨다. "이것을 받아서 함께 나누어 마셔라. 1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올 때까지, 포도나무 열매에서 난 것을 절대로 마시지 않을 것이다." 19 예수께서는 또 빵을 들어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떼어서 그들에게 주시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 20 그리고 저녁을 먹은 뒤에, 잔을 그와 같이 하시고서 말씀하셨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다.” (누가복음서 22:14-20)
여기 ‘감사를 드리신’의 그 감사(感謝)는 그리스어 εὐχαριστέω에서 온 단어이고, 추수 감사절의 그 ‘감사’, ‘Thanksgiving’이 바로 ‘Eucharist’입니다. 그런데 이 감사라는 단어를 교회는 단지 추수 감사절에만 특별히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매 주일 우리 신앙인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찬양을 하고 기도를 하고, 예배 후 친교 시간을 갖고 하는 그 사이에 우리는 사실 그 감사의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바로 매 주일 드리는 ‘성찬식/성찬례’, ‘Holy Communion’이라고 하는 그 성찬의 의식/예식이 바로 그것입니다. ‘성찬식/성찬례’ 그 단어가 바로 Eucharist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제정하신 교회 예식이 바로 성찬식/성찬례, 즉 감사의 의식/예식인 것입니다. 아들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또한 그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오시어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 그 우리의 주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처참한 죽음을 당하신 그 주님께 너무 미안하고 죄송하고, 그러나 너무 감사해서, 그래서 잊지 않고 꼬박꼬박 그 미안함과 감사함을 표하며, 그 주님의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기 위해서 세상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매일, 혹은 매주, 혹은 한 달에 한 번, 혹은 일 년에 몇 번씩 드리는 그 감사의 의식/예식이 바로 성찬식/성찬례입니다.
“23 내가 여러분에게 전해 준 것은 주님으로부터 전해 받은 것입니다.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빵을 들어서 24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 25 식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시고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다. 너희가 마실 때마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 26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선포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23-26)
그때 초대교회부터 지켜오던 교회의 감사의 예식이 바로 성찬식인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 그 자체가 바로 감사의 예식입니다. 주일에 드리는 예배 그 전체를 그래서 the Holy Eucharist라고 부르기도 하고, 또한 설교 이후에 행하여 지는 성찬식을 the Celebration of the Eucharist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빵을 들어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하고 바울 사도가 말하는데, 그렇다면 그날 그때 주님은 무엇이 감사하셨을까요? 무엇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셨을까요? 주님을 잡으러 로마 군인들이 언제 들이닥칠 지 알 수 없고, 이제 잡히면 온갖 수난과 모욕과 고문을 당하실 것이 뻔하고, 그리고 결국 십자가에 못이 박혀 돌아가실 것인데. 그리고 그걸 이미 다 알고 계시는데 도대체 무엇이 감사하셨을까요? 왜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셨을까요? 제자들 눈에도 우리 눈에도 감사할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데. 혹시 우리가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그 무엇을 주님은 그때 보셨을까요, 그때 아셨을까요? 그렇다고 한들 그게 감사해야 할 일이었을까요?
나 혼자 자랐다, 나 혼자 컸다, 나의 실력과 능력으로 여기까지 왔다, 그러니 딱히 누구에게 감사할 것도 없고 따라서 미안할 것도 없다 한다면,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살아간다면, 그건 아마도 내가 아직 철이 들지 않았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철들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그 말의 뜻이 ‘사리를 분별하여 판단하는 힘이 생기다’ 라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그런 딱딱한 설명 말고, 우리가 일상에서 누구를 보고 ‘철든다’ ‘철들었다’라고 말할 때는 그 누구가 이제 제법 ‘어른스러워졌다’고 여길 때입니다. 그렇다면 여기 ‘어른스러워졌다’는 또 무슨 말일까요? ‘어른스러워졌다’는 ‘나이는 어리지만 어른 같은 데가 있다’라는 말입니다. 그럼 ‘어른 같은 데가 있다’는 건 또 무슨 말일까요? ‘어른’이란 말의 뜻을 국어사전에서 찾았더니 다섯 가지가 나왔습니다.
- 다 자란 사람. 또는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
- 나이나 지위나 항렬이 높은 윗사람.
- 결혼을 한 사람.
- 한집안이나 마을 따위의 집단에서 나이가 많고 경륜이 많아 존경을 받는 사람.
- 남의 아버지를 높여 이르는 말.
그런데 그게 다일까요? 그 중에 하나만 충족되면 그 사람을 어른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그러나 저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하고 싶습니다. 적어도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이것이 오히려 누군가가 철이 들었고, 어른이 되었다고 여길 수 있는 증거가 되지 아닐까 싶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감사를 알게 될 때, 정말 무엇이 내가 하나님께 감사할 일인지 깨닫게 되었을 때, 그래서 하나님께 내가 감사를 할 줄 알게 될 때, 그리고 그 하나님께 내가 감사를 표현하고 실천하고 나아가 그 감사를 나의 삶으로 나의 일상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을 바로 그때가 정말 내가 철이 들고 정말 내가 어른이 되었을 때가 아닐까 싶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숙한 신앙인이 되었을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신앙의 어른, 그 어른은 그래서 감사를 아는 신앙인, 감사할 줄 아는 신앙인, 그 감사를 살아가는 신앙인입니다. 단지 하나님에게만이 아니라 내가 만나고 헤어지고, 또한 지금 여기 함께 있고 더불어 살고 있는 사람들과 이웃에게 감사할 줄 알고, 그래서 그 감사를 나의 몸과 맘으로 전하고 표현하는 신앙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그 은혜에 감격해서 그 참을 수 없는 감사와 은혜로 인하여 모든 것들이 저절로 나에게 또한 감사가 되고 은혜가 되어버린 신앙인입니다. 그 사람을 우리는 신앙의 어른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바로 그런 감사의 사람, 은혜의 사람, 신앙의 어른입니다.
“4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다시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5 여러분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6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을 오직 기도와 간구로 하고,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7 그리하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빌립보서 4:4-7)
기쁨은 감사에서 나옵니다. 무엇이 내 손에 있어 기쁘고, 무엇이 내 집에 가득 있어 감사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나를 찾아 내게 오셨고, 또한 나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가까이 계시니 감사한 것입니다. 감사의 마음으로 그 나의 주님께, 그 나의 하나님께 모든 것을 아뢰는 것이 기쁨입니다. 아뢸 수 있으니 또한 감사한 것입니다. 감사하니 또 기쁜 것입니다. 무엇이 있어 나에게 평화가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내 곁에 계시니, 그 평화의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시니, 내가 그 하나님 곁에 있고 그 안에 있으니 나에게 평화가 있는 것입니다.
“11 내가 궁핍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12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13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4:11-13)
나에게 무엇이 있어도 감사하고, 무엇이 없어도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어떤 고난도, 고통도, 시련도 지금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나에게는 굶주림도 궁핍도 지금 없고 또한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감사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나에게 있어도 그리고 있을 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감사하고 또 감사할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왜? 바로 나에게 그 모든 것들을 이겨낼 능력을 주시는 한 분 하나님, 한 분 그리스도 예수 나의 주님, 그 안에 내가 있어,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구원이고 그것이 은혜이고 그것이 복음이고 그것이 바로 내가 감사하는 이유라는 것입니다. 나는 이미 그 귀한 것을 받았고, 그리고 그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셨고, 그 주님 안에 내가 있으니, 나는 그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다,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감사합니다.
무엇이 나에게 넉넉하고 풍족해서가 아니라, 내가 초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편이 되셨고, 주님이 내 곁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나의 약함이 그분의 강하심으로 세워질 것이고, 나의 가난함이 그분의 부유함으로 채워질 것이니, 그게 감사할 이유입니다. 그 감사를 아는 것, 그 감사에 눈을 뜨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에 내가 눈을 뜨는 것이고 내가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이만큼 키가 자라고 신앙이 자랄 수 있던 것에 감사하고, 나를 위한 내 일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내 이웃을 위한 그 일을 조금이라도 할 수 있고 또 그들의 짐을 조금이라도 나누어 질 수 있어 감사한 사람이 바로 어른입니다.
많은 시련과 어려움과 험난함과 곡절과 질곡 속에서도 이 나이가 될 수 있던 것에 감사하고, 지위도 높지 않고 이룬 것도 별로 없고 딱히 지금 누리는 것도 없지만 그래서 세상 사람들의 존경은 커녕 연극으로 말하면 우물가 여인 1, 2 혹은 행인 1,2의 인생이라고 사람들은 말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목마른 줄리엣에게 우물물 한 그릇 건네는 그 일을 내가 하고, 길을 묻는 로미오에게 길을 가르쳐주는 그 일이 내가 할 수 있어서, 그래서 나 없이 주인공 역시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그런 ‘나’여서 감사하다면, 그게 어른입니다. 철이 제대로 든 어른, 제철 과일로 주님 앞에 선 신앙인입니다.
“9 여기에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는 한 아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0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앉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 곳에는 풀이 많았다. 그래서 그들이 앉았는데, 남자의 수가 오천 명쯤 되었다. 11 예수께서 빵을 들어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앉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시고, 물고기도 그와 같이 해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요한복음서 6:9-11)
여자들과 아이들을 제외한 남자들만 오천 명인데, 내 손에 있는 것은 겨우 빵 다섯 개와 두 마리 물고기가 전부입니다. 그런데 그걸 들어서 감사 기도를 드리십니다. 지금 주님은 당신의 손에 있는 다섯 개의 빵과 두 마리 물고기를 통해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하실 그 놀라운 일을 보고 계십니다. 그 작은 것을 통해 그리고 여기 당신의 아들을 통해 하실 하나님 아버지의 그 놀라운 일을 지금 보셨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놀라운 일을 하실 것을 아셨기 때문에, 나의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것을 믿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님은 아버지께 감사 기도를 드리실 수 있으셨습니다.
“아버지 당신께서 하실 일을 내가 봅니다, 지금 내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을 보지 않고 내 손에 있지 않은, 그러나 당신 손에 이미 있는 그것을 나는 지금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이유가 없고, 기도하지 않을 이유가 없고, 찬양하지 않을 이유가 없고, 예배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지금 여기 나를 보고 계시고, 지금 여기 나와 함께 계시는 나의 아버지 하나님이시니 내가 감사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 여기 하늘을 우러러 감사 기도를 드리시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지금 손에 든 것, 쥐고 있는 것, 꼭 붙잡고 있는 그것이 우리를 감사의 자리에 서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 내가 주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는 것, 그것이 우리를 감사의 자리에 서게 하는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께서 하실 일, 나를 위해 준비하고 계신 그것을 믿는 믿음이 우리를 감사의 자리에 서게 합니다. 그 소망이 우리를 감사의 자리에 서게 합니다.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이 우리를 감사의 자리에 서게 합니다.
이것이 추수 감사절 뿐만 아니라 매 주일을 감사 주일로 축하하고 기념하고 찬양하고 예배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 그 감사를 알고 깨닫고 기억하고, 그래서 감사를 말하고 노래하고 전하고 표현하고, 또한 그 감사를 일상에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 신앙인이 드리는 예배이고 찬양이고 기도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성찬식에서 나누는 빵과 포도주입니다. 빵과 포도주를 통해 그 감사를 나의 눈으로 보고, 나의 입에 넣어 그 감사를 맛보고, 그 감사가 나의 안으로 들어와 나의 온 몸과 맘과 영으로 그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드리는 참 예배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이 바로 주님께 드리는 감사의 예배입니다.
감사의 계절, 감사의 절기, 매일 매일을 주님의 감사를 알고, 주님의 감사를 전하고, 주님의 감사를 실천하고, 주님의 감사를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이 시편이 여러분과 저의 감사의 기도, 감사의 찬양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온 땅아, 주님께 환호성을 올려라. 2 기쁨으로 주님을 섬기고, 환호성을 올리면서, 그 앞으로 나아가거라. 3 너희는 주님이 하나님이심을 알아라. 그가 우리를 지으셨으니, 우리는 그의 것이요, 그의 백성이요, 그가 기르시는 양이다. 4 감사의 노래를 드리며, 그 성문으로 들어가거라. 찬양의 노래를 부르며, 그 뜰 안으로 들어가거라. 감사의 노래를 드리며, 그 이름을 찬양하여라. 5 주님은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 영원하다. 그의 성실하심 대대에 미친다.” (시편 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