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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에 대한 많은 생각을 갖게 하는 말씀입니다.

“9 참 빛이 있었다. 그 빛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다. 10 그는 세상에 계셨다.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11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요한복음서 1:9-11)

 

빛이 있었고, 그 빛이 세상에 왔고 또 나에게 왔고, 그 빛이 세상을 비추고 또한 나를 비추고 있고. 그런데 왜 세상은, 왜 사람들은 그 빛을 알아보지 못했을까? 정말 몰랐을까? 아니면 알면서 모른 척 보지 못한 척 했거나 외면했거나 피했거나 했다는 말일까? 만남이란 뭘까? 우리가 소중한 만남이라고 부르는 그 만남은 어떤 만남을 두고 말하는 것일까? 그런데 세상에 소중하지 않은 만남이라고 부를 수 있는 만남이 따로 있을까? 내가 건방지고 무례하고 무지하고 어리석어 뭘 몰라서, 그래서 무엇은 소중하고 무엇은 하찮고 무엇은 너무 작고 소소하다고 여길 뿐, 내가 그렇게 함부로 겁도 없이 생각하고 말을 할 뿐. 세상에 소중하지 않은 만남이라는 것이 존재할까? 세상에 소중하지 않은 사람은 없고, 하찮은 존재는 없는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그 모든 소중한 사람들, 귀한 존재들이 같은 시간과 같은 공간에 내가 잘 알던 모르던 함께 있다면, 그래서 옷깃이라도 스친다면 그건 정말 소중한 만남이 아닐까?

 

빛이 세상에 와서 세상을 비추고 우리를 비추고 나를 비추는데, 그 빛을 모른다면 그 빛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맞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건 내가 눈을 감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내 마음의 눈, 내 영의 눈을 감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건 누구 탓일까? 그 나를 비추고 있는 그 빛 탓일까? 아니면 눈을 감고 그 빛을 보지 않는 나의 탓일까? 그 빛을 등지고 있는 나의 탓 아닐까? 빛이 싫다고 동굴 속으로 자꾸만 들어가는 나의 탓 아닐까? 그런데 그 나의 동굴까지 찾아오신 그 빛을 싫다고 그 빛 내가 꺼버리겠다 한다면 그건 정말 나의 엄청난 실수를 넘어 죄가 되는 것은 아닐까?   

 

  1.  

“9 참 빛이 있었다. 그 빛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다. 10 그는 세상에 계셨다.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11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12 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13 이들은 혈통에서나, 육정에서나, 사람의 뜻에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에게서 났다. 14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요한복음서 1:9-14)

 

하나님과 세상의 만남, 하늘과 땅의 만남. 창조주와 피조물의 만남, 하나님과 나의 만남, 빛과 어둠의 만남, 빛이신 그리스도 예수와 어둠 속에 있던 나의 만남, 주인이신 하나님과 종인 나의 만남,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자녀인 나의 만남. 그리고 그 만남을 통해 은총에 눈을 뜨는 나, 그리고 그 만남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나. 그래서 만남이 영원 속으로 이어지는 하나님 나라와 그 나라에 내가 영원히 있어, 그 나라를 그리스도 예수와 영원히 살아가는 나. 결국 소중한 만남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 너무도 익숙한 단어, ‘인연’, 사람들 사이에 맺어진 관계. 우리 한국 사람들은 버릇처럼 인연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만남, 소중한 관계를 표현하곤 합니다. 만남에 인연이라는 말을 덧붙여 그 만남이 정말 나에게 우리에게 소중한 만남이라는 것을 강조하곤 합니다. 불교 신자가 아니어도 동양 철학이나 사상에 깊은 이해가 있지 않아도 우리는 자연스레 사람들 사이에 맺게 되는 소중한 관계를 말할 때 인연이라고 합니다. 우리 신앙인은 그 너무도 익숙하고 친숙한 단어인 인연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요?

그 인연이란 단어는 요즘에는 일종의 한국 문화와 사상과 철학과 심성을 넘어 종교성까지 표현하는 훌륭한 단어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바로 관계가 사로지고 있는 지금 현대인의 일상과 삶 속에 점점 놓치고 잃어가는 그 관계를 일깨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서로가 있고 사이가 있는 우리, 우리는 관계를 맺는 관계적 존재라는 것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서양인들이 ‘인연’이라는 단어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는 이유 중에 하나, 그건 관계를 잃어가는 현대인과 현대성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이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1.  

올해 미국 아카데미 영화제에 작품상과 각본상 후보에 오른 영화가 있습니다. 셀린 송의 <Past Lives> 한국어로는 전생이라 해야 옳지만 그 영화를 보면 인연이라는 것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12살에 훌쩍 부모를 따라 캐나다 토론토로 이민간 한 소녀가 12년이 지나 이제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 극작가가 되었고, 그 한 소녀가 사랑했던 소년은 군대를 제대한 후 대학에 복학을 했습니다. 극작가가 된 이 소녀는 어느 날 문득 사랑했던 그 소년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SNS를 통해 만나 사랑을 키워갑니다. 바다를 건너고 시공간을 건넌 만남, 인연입니다. 12년의 공백을 잇는 인연의 끈입니다. 그렇게 연결됩니다. 다시 만났습니다. 그러나 여자는 그 남자에게 점점 몰입하는 자신이 싫습니다. 서울에서 캐나다 토론토로, 그리고 미국 뉴욕으로 꿈을 찾아 왔는데, 조금씩 그 남자가 전부가 되어가는 것이 싫습니다.

노벨 문학상을 꿈꿨던 소녀는 이제 미국 최고의 문학상 퓰리처상을 꿈꾸는 극작가가 되었는데, 여기서 멈출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잠깐 헤어지자고 말합니다. 그렇게 다시 12년이 흐릅니다. 여자는 동료 작가와 만나 결혼을 했고, 남자는 중국 어학 연수에서 만난 여자와 얼마 전에 헤어졌습니다. 그리고 남자는 여자를 만나기 위해 뉴욕에 옵니다. 남자는 여자를 만나고 여자의 남편도 만납니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12살 소녀와 소년이 아닙니다. 거기에 24살을 더한 여자 어른과 남자 어른이 되어버렸습니다. 서울로 돌아가는 남자에게 여자가 말합니다. 그들의 인연은 여기까지라는 것. 남편의 품에 안겨 우는 여자, 택시 안에서 동이 터오는 뉴욕을 바라보는 남자. 뉴욕에 살고 있는 여자는 지금 남편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살아갈 것입니다. 서울로 돌아가는 남자는 거기서 또 어떤 인연을 살아갈 것입니다.

만남에 대한 이야기, 인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함부로 할 만남은 없고, 모든 만남은 소중한 것입니다. 그것이 인연입니다. 내가 알 수 없는 끈이 나와 너, 우리 사이를 맺고 끊고 다시 잇고는 합니다. 만남입니다. 인연입니다. 그리고 관계입니다. 함부로 할 만남도 인연도 관계도 없습니다. 우리가 뭣 모르고 잘 모르고 그렇게 생각하고 여기고 대할 뿐.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여기 나와 너의 만남, 그건 인연이고, 소중한 관계라는 것. 여자는 뉴욕 근교 작가들에게 작업실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에서 만난 유대인 출신 작가인 남편과의 그 만남을 인연이라 여기며 그 소중한 만남과 인연을 살아갈 것입니다.

 

소중한 만남이란 무엇일까? 함부로 할 만남도 있을까? 지금 여기 나를 눈 뜨게 하는 그 만남은 무엇일까? 그런데 지금 내가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지금 이 만남이 그저 이번 한 번 뿐이었을까? 과거에는 없었을까? 어제는 없었을까?  과거의 그 수 많은 만남, 그리고 만났던 사람들, 그리고 스치고 지나갔던 그 많은 사람들과의 짧은 스침과 같은 만남과 우연한 만남. 그냥 그게 다였을까?  

 

  1.  

저는 신앙인으로서 인연, 즉 소중한 관계, 소중한 만남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그 모든 만남과 스침과 관계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셨다, 빛이 와서 나와 우리를 비추고 있었다, 무엇이 소중하고 소중하지 않고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땅 위에 비를 내리시 듯 은총은 계속 나와 우리에게 내리고 있었고, 그 빛은 계속 나와 우리를 비추고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 우리가 마침내 그 은총에 눈을 뜨는 그 때를 주님은 기다리시고 또 기다리시고 계셨다. 내가 몰랐을 뿐, 내가 소홀히 대했을 뿐, 내가 무지하고, 내가 무시하고, 내가 외면하고, 내 눈이 어둡고 내 귀가 어둡고 내 마음이 어두워 그랬을 뿐, 그리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또 상처를 받고 하면서.  

 

그러나 그 주님도 상처를 받고 또 받고 계셨는데. 포기가 없으신 그 주님은 계속해서 그 만남을 이렇게 저렇게, 이 사람을 통해 저 사람을 통해, 여기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를 통해, 나무 위에 지저귀는 새 한 마리와 풀벌레를 통해, 폭풍우와 눈과 번개를 통해, 이렇게 저렇게 그 만남을 계속 시도하셨고, 시도하고 계시고 또 시도할 것인데.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눈을 뜰 것인가, 그분을 알아볼 것인가, 모든 만남을 잘 모르면서 이것 저것 가릴 것인가, 아니면 그 모든 순간 모든 스침 모든 만남에 내 마음과 영을 열어 주님을 알아챌 것인가, 주님을 알아볼 것인가, 그럴 마음이 있는가, 그럴 채비가 되어 있는가?

 

인연. 끈입니다. 관계의 끈. 그 시작은 바로 이것입니다.

“1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2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3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니, 그가 없이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다. 창조된 것은 4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의 빛이었다. 5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 (요한복음서 1:1-5)

 

그리고 우리가 모르고, 겁 없이, 엉겁결에 놓아버린 그 끈을 놓지 않으시고, 당겨도 도무지 올 생각을 하지 않으니, 아예 그 끈을 따라 오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의 주님. 이래도 그 끈을 잡지 않을 것이냐, 정녕 놓을 것이냐, 묻고 계신 주님.

“9 참 빛이 있었다. 그 빛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다. 10 그는 세상에 계셨다.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11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요한복음서 1:9-11)

 

“그러지 말아라, 그러지 마십시오” 지금 요한 사도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도 처음엔 그랬는데, 당신들은 그러지 마십시오. 이분이 바로 말씀이시고 창조이시고 하나님이시고 그리스도시고, 바로 여러분과 저의 살아계신 하나님, 살아계신 생명의 말씀이십니다, 우리의 빛이십니다, 그에게 눈을 뜨십시오, 그 은총에 눈을 뜨십시오, 그 생명의 끈을 움켜잡으십시오, 생명이 오셨습니다.” 바로 요한 사도의 말입니다.

 

  1.  

지난 주 금요일 청소년 모임에서 나눈 말씀은 이것입니다.  

“30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길까? 또는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31 겨자씨와 같으니, 그것은 땅에 심을 때에는 세상에 있는 어떤 씨보다도 더 작다. 32 그러나 심고 나면 자라서, 어떤 풀보다 더 큰 가지들을 뻗어,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마가복음서 4:30-32)

 

그 모임에서 첫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혹시 세상에서 가장 큰 나무가 무엇이고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거대한 나무는 처음부터 이렇게 컸을까? 그 작은 씨가 이렇게 크게 된 것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다음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미스터리’란 무엇을 말할까? 알거나 설명하기 어렵거나 불가능한 것이 미스터리의 사전적인 뜻인데. 그런데 누구에게 미스터리일까? 우리에게 아니면 하나님에게. 그리고 마지막 질문입니다. 여기 예수님은 왜 겨자씨의 비유를 들어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치셨고 설명을 하셨을까?  

사람들은 그 작은 씨가 하나님 나라인 걸 알았을까? 너무 작아서 몰랐을까? 하나님의 아들이 아기로 와서 몰랐을까요? 일개 목수의 아들로 와서 몰랐을까요? 그저 그런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들의 우두머리 정도여서 몰랐을까요? 가난한 사람과 병든 사람과 거리의 여인과 고아와 과부와 죄인과 이방인들과 어울리는 예수라 몰랐을까요? 별 볼 게 없는 사람들 모아 하나님 나라는 이렇다 저렇다 그런 말이나 하는 예수라 몰랐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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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빛이 있었다. 그 빛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다.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일찍이,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아버지의 품속에 계신 외아들이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알려주셨다.”

 

빛이 왔다, 빛이 비추었다, 그 빛을 맞아들인다, 바로 소중한 만남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게 관계 맺기입니다. 말씀이 나를 만나기 위해 오셨다, 우리가 주님의 형제자매가 되고 우리가 주님의 아버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런 사랑의 관계를 맺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 그 이름을 믿는 우리의 믿음이 우리를 주님과의 소중한 만남 속으로, 깊고 친밀한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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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너무 작아, 겨우 겨자씨 정도라서 우리가 몰랐고 또한 알아보지 못한다면, 그럼 그 주님이 엄청 크게 우리 앞에 서 계신다면 우리는 알까요, 알아볼까요?

하나님께서 욥에게 물으십니다.

“1 그 때에 주님께서 욥에게 폭풍이 몰아치는 가운데서 대답하셨다. 2 네가 누구이기에 무지하고 헛된 말로 내 지혜를 의심하느냐? 3 이제 허리를 동이고 대장부답게 일어서서, 묻는 말에 대답해 보아라. 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거기에 있기라도 하였느냐? . . . 5   누가 이 땅을 설계하였는지, 너는 아느냐? 누가 그 위에 측량줄을 띄웠는지, 너는 아느냐? . . . 8 바닷물이 땅 속 모태에서 터져 나올 때에, 누가 문을 닫아 바다를 가두었느냐? . . . 16 바다 속 깊은 곳에 있는 물 근원에까지 들어가 보았느냐? 그 밑바닥 깊은 곳을 거닐어 본 일이 있느냐? 17 죽은 자가 들어가는 문을 들여다본 일이 있느냐? 그 죽음의 그늘이 드리운 문을 본 일이 있느냐? 18 세상이 얼마나 큰지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느냐?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어디 네 말 한 번 들어 보자. 19 빛이 어디에서 오는지 아느냐? 어둠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아느냐? 20 빛과 어둠이 있는 그 곳이 얼마나 먼 곳에 있는지, 그 곳을 보여 줄 수 있느냐? 빛과 어둠이 있는 그 곳에 이르는 길을 아느냐?” (욥기 38:1-20)

 

우리는 모릅니다.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 처음 겨우 겨자씨만한 하나님 나라. 그리고 우리가 숨 쉬는 공기처럼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하나님. 그러나 세상을 채우시고 우리의 몸을 순간순간 채우시는 그 하나님을 우리는 너무 작아서 모릅니다.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하나님이 너무 커서 모릅니다. 너무 크신 하나님을 우리는 알아보지 못합니다. 볼 수 없습니다. 그 하나님의 뜻도 모르고, 그 마음도 모르고, 그 모습도 모르고, 그 하시는 일도 모르고. 우리는 그분이 너무 커서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도 그랬듯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하시고 하시는 그 일을 아는 사람도 없습니다.

 

작아도 모르고 커도 모르고. 너무 작아서 알아보지 못하고, 너무 커서 알아보지 못하고. 그래서 우리 사람의 크기로 오셨는데 여전히 우리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9 참 빛이 있었다. 그 빛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다. 10 그는 세상에 계셨다.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11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요한복음서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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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모습으로, 우리의 크기로 오신 주님과 만났던 사람들입니다. 그 많은 만남들 중 몇 가지입니다. 누구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만남이었고, 누구에겐 의미 없는 만남, 잘못된 만남, 후회 가득한 만남이었습니다.     

 

“17 예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한 사람이 달려와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그에게 물었다. "선하신 선생님,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18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는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선한 분이 없다. 19 너는 계명을 알고 있을 것이다. '살인하지 말아라, 간음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거짓으로 증언하지 말아라, 속여서 빼앗지 말아라, 네 부모를 공경하여라' 하지 않았느냐?" 20 그가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나는 이 모든 것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 21 예수께서 그를 눈여겨보시고, 사랑스럽게 여기셨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에게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22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을 짓고, 근심하면서 떠나갔다. 그에게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 (마가복음서 10:17-22)

 

재산이 많았으니 만날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고, 그를 만나고 싶어한 사람도 많았을 것이고.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 유명한 사람들, 힘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을 것입니다. 그게 이 사람에겐 소중한 만남들입니다. 지금 여기 예수님과 만남은 불편한 만남입니다. 그 부자 청년은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울상을 짓고, 근심하면서 떠나갔답니다. 차라리 만나지 않았다면 맘이라도 편하게 살았을 텐데. 후회막급의 만남입니다. 모르는 것이 약이었습니다. 만나지 말 것을. 그러나 이미 만나버렸으니 . . . 지우고 싶고 잊고 싶은 만남입니다. 그냥 의미 없는 스침이고 싶고 우연한 만남이고 싶을 뿐.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나중에 이 만남을 그 사람은 어떻게 기억할까요? 악연이었다 할까요? 잘못된 만남이었다고 할까요? 그렇다면 그의 재산이 이 사람에게 무슨 도움이 되었을까요? 주님과의 소중한 만남이 그 재산 때문에 불편한 만남, 잘못된 만남이 되었는데. 그 재산이 도대체 이 사람에게 무슨 도움이 되었을까요?

 

  1.  

이어서 마가복음서에는 이 잘못된 만남과는 전혀 다른 만남 하나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46 그들은 여리고에 갔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큰 무리와 함께 여리고를 떠나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 가에 앉아 있다가 47 나사렛 사람 예수가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고 외치며 말하기 시작하였다. 48 그래서 많은 사람이 조용히 하라고 그를 꾸짖었으나, 그는 더욱더 큰소리로 외쳤다. "다윗의 자손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49 예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 눈먼 사람을 불러서 그에게 말하였다. "용기를 내어 일어나시오. 예수께서 당신을 부르시오." 50 그는 자기의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서 예수께로 왔다. 51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바라느냐?" 그 눈먼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내가 다시 볼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52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러자 그 눈먼 사람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가 가시는 길을 따라 나섰다.” (마가복음서 10:46-52)

 

정 반대의 만남입니다. 잘못된 만남처럼 보이는데, 여기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만남이 되었습니다. 세상 가장 따뜻하고 곱고 아름다운 인연이 되었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방금 벗어 던진 그 겉옷이 갖고 있는 전부였던 눈먼 거지. 그러나 이제 세상을 다 가졌습니다. 우연한 만남이라 할 수 있습니다. 늘 거기 앉아 구걸했던 그 사람. 오늘은 왠지 거리가 온통 시끄럽고 소란스럽습니다. 눈이 보이질 않으니 귀는 밝아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습니다. 하나도 흘려 듣지 않습니다.

 

“예수가 지나간다, 그 기적을 일으키는 예수가 지나간다, 누구는 메시아라고도 하는 그 예수가 지나간다.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는 그 예수가 지나간다. 오신다 했던 그분이 지나간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생각할 겨를 없습니다. 우연이겠지, 그 많은 길을 두고 여기를 그것도 내가 있는 이 시간에 지나가다니. 우연이어도 좋고 필연이어도 좋고, 그게 무슨 상관인가, 그 예수가 지나간다는데.

여기 눈이 아닌 귀로, 몸이 아닌 마음으로 주님을 만나는 바디매오입니다. 그 우연의 만남을 놓치지 않습니다. 놓칠 수 없습니다. 다시 없을 기회인데. 그걸 그렇게 날려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걸 잡았습니다. 나는 보고 싶습니다. 나는 세상을 보고 싶고, 당신도 보고 싶고, 나의 얼굴도 보고 싶습니다. 간절함은 우연한 만남을 소중한 만남으로 돌려놨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그 말 한마디가, 주변을 아랑곳 않고 외치고 부르짖는 그의 절실함이 우연한 만남을 소중한 만남으로 만들었습니다.     

 

  1.  

빛이 세상에 왔고, 빛이 눈이 먼 그에게 왔고, 그는 그 빛을 잡아 세웠고, 그 빛을 움켜쥐었고, 그리고 그 빛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빛은 그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는 빛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는 그 빛이 가는 길을 따라 갑니다. 빛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그 빛의 길을 따라 나섰습니다. 고개 숙인 채로 울상을 짓고 근심하며 떠난 그 부자와는 전혀 다른 길을 갑니다. 더 이상 어둠이 아닌 빛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그리고 이제 그는 빛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부자의 이름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눈먼 거지의 이름은 알고 있습니다. 그는 디메오의 아들 바디매오입니다. 그 이름은 하늘에 빛난 별이 되었습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이름은 빛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부자 청년의 이름을 여전히 우린 모릅니다.

 

서로 다른 길에서 만난 같은 만남.  그러나 결국 다른 만남이 되었고, 다른 길을 갔습니다. 그런데 그 길이 바뀌었습니다. 그 부자 청년이 주님을 만나기 위해 왔던 길은 누가 봐도 밝고 경쾌한 신작로처럼 잘 닦인 길이었고, 바디매오가 주님을 만나기 위해 왔던 길은 누가 봐도 초라하고 가난하고 형편없는 흙과 자갈과 먼지 투성이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부자 청년이 돌아가는 길에 짙은 어둠이 깔렸습니다. 그러나 지금 바디매오가 걷는 길은 빛의 길입니다. 주님께서 가시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1.  

어떤 만남을 원하십니까? 여기 악연처럼 보이는 우연한 만남이 하나 있습니다.

“21 그런데 어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길에, 그 곳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로서, 구레네 사람 시몬이었다. 그들은 그에게 강제로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하였다.” (마가복음서 15:21)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가셨던 길에 우연히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었던 구레네 사람 시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거기 계획하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께서 가시는 길목에 서 있던 시몬이 아니고, 그냥 우연히 거기 있었습니다. 우연히 로마 군인의 눈에 띄어 우연히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었던 시몬입니다.  잘못된 만남인 줄로 알았는데, 재수없는 만남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 . .

“13 주님 안에서 택하심을 받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여 주십시오.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이기도 합니다.” (로마서 16:13)

 

바울 사도 역시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참 신앙인, 신앙인의 모범인 루포와 그의 어머니. 나중에 그때 그 구레네의 시몬과 그의 가족은 이렇게 초대 교회와 교인들에게 알려졌고 기억되고 있습니다. 악연인 것으로 알았는데, 정말 잘못된 만남인 것으로 알았는데, 그 만남이 나를 살리고 내 가족을 살리고 내 이웃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는 소중한 만남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것을 시몬은 알았을까요? 보았을까요? 시몬은 그 만남을 그냥 흘려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 만남을 붙들었습니다. 당장은 싫었지만 그러나 그 만남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붙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만남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는 깨달았습니다.  

 

빛은 그렇게 우리를 비춥니다. 우리가 그 빛을 붙잡지 않으면, 그 빛에 사로잡히지 않으면, 그게 싫다고 등을 지면 우리는 나의 그림자만 볼 뿐입니다. 어둠은 내가 만드는 것이지 빛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모든 만남 속에서 주님을 보는 것, 그것은 은총에 눈을 떠야 가능합니다. 은총의 비가 내려도, 내가 그 비를 맞고 있어도 모릅니다. 은총의 빛이 나를 비춰도, 내가 그 빛을 받고 있어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건 내가 은총에 눈을 뜨지 않아서 입니다. 은총의 비가 나에게만 내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은총의 빛이 나를 피해 비추는 것이 아니라, 내가 눈을 감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눈, 영의 눈을 감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작 누가 눈이 먼 거지이고, 정말 누가 눈을 뜬 부자일까요? 같은 만남인데, 왜 다른 만남이 되었을까요? 같은 주님이신데, 왜 다른 주님을 만났을까요? 눈을 떠야 합니다. 믿음입니다. 그 주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은총의 비가 내게 이미 벌써 내리고 있었고 지금도 내리고 있다는 것, 은총의 빛이 나를 이미 비추고 있었고 지금도 비추고 있다는 것을 믿는 것. 그래야 보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수많은 만남, 수많은 스침이 있었지만 그 모든 만남과 스침이 다 소중한 만남이었는데. 골라잡겠다 했던 나를 그만 내려놓고 눈을 떠야 합니다. 마음의 눈, 영의 눈을 떠야 합니다.      

 

“참 빛이 있었다. 그 빛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참 빛이 있었다. 그 빛이 나에게 와서 나를 비추고 있다. 나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리고 나는 지금 여기 그 영광을 보고 있다. 그리고 나는 영원히 그 영광 속에 있을 것이다.”

모든 만남들 속에 계신 주님의 은총에 눈을 뜨고, 또한 그 은총을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