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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요한복음서는 다른 세 복음서 – 마태복음서, 마가복음서, 그리고 누가복음서 – 와는 사뭇 다르게 시작합니다.

“1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2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3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니, 그가 없이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다. 창조된 것은 4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의 빛이었다. 5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 (요한복음서 1:1-5)

 

마태복음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1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는 이러하다. 2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 . . 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다.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가 태어나셨다. 17 그러므로 그 모든 대 수는 아브라함으로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으로부터 바빌론에 끌려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빌론으로 끌려간 때로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이다. 18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심은 이러하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나서,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 .

2:1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셨다.” (마태복음서 1:1-18; 2:1)

 

시간과 공간 속으로, 우리 인간의 역사 속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우리 같이 피와 살과 뼈를 갖는 있는 한 사람으로 오신 그리스도 예수. 그 예수가 바로 유대인들이 기다렸던 그 메시아다, 그 예수가 바로 다윗의 후손이다 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산 위에서 가르치시는 예수를 통해 그 옛날 시내 산 정상에 서 있었던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 유대인들의 위대한 스승, 그 모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1 우리 가운데서 일어난 일들에 대하여 차례대로 이야기를 엮어내려고 손을 댄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2 그들은 이것을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요 전파자가 된 이들이 우리에게 전하여 준 대로 엮어냈습니다. 3 그런데 존귀하신 데오빌로님, 나도 모든 것을 시초부터 정확하게 조사하여 보았으므로, 각하께 그것을 순서대로 써 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4 이리하여 각하께서 이미 배우신 일들이 확실한 사실임을 아시게 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5 유대왕 헤롯 때에, 아비야 조에 배속된 제사장으로서, 사가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인데, 이름은 엘리사벳이다.” (누가복음서 1:1-5)

 

보다 더 구체적인 시간적 공간적 역사적 배경과 사실을 우리에게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보다 앞서 태어난 세례 요한에 대해 아주 꼼꼼하게, 이어서 아기 예수의 출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상당히 세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1 그 때에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칙령을 내려 온 세계가 호적 등록을 하게 되었는데, 2 이 첫 번째 호적 등록은 구레뇨가 시리아의 총독으로 있을 때에 시행한 것이다. 3 모든 사람이 호적 등록을 하러 저마다 자기 고향으로 갔다. 4 요셉은 다윗 가문의 자손이므로, 갈릴리의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에 있는 베들레헴이라는 다윗의 동네로, 5 자기의 약혼자인 마리아와 함께 등록하러 올라갔다. 그 때에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는데, 6 그들이 거기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마리아가 해산할 날이 되었다. 7 마리아가 첫 아들을 낳아서,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눕혀 두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방이 없었기 때문이다.” (누가복음서 2:1-7)

 

소설이나 허구가 아니다, 역사적 사실이다, 인간의 역사 그 한복판으로 오신 메시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서는 이어서 들에서 양을 치던 가장 가난하고 천대 받고 괄시 받고 소외된 사람들이었던 목자들이 아기 예수 탄생 소식을 듣게 된 사람이었고, 또한 그 아기를 처음 방문하고 축하했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며, 본격적으로 이방인들, 죄인들, 가난한 사람들, 병들고 소외되고 버려진 사람들을 찾아 나선 예수, 잃은 양들을 찾아서 오신 예수의 모습을 미련할 정도로 세상의 모든 짐을 죄다 자기 등에 진 채 느릿느릿 힘겹게 언덕을 오르는 황소의 모습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가복음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은 이러하다.” (마가복음서 1:1)

 

이런 얘기 저런 얘기 할 시간 없다, 그럴 때도 아니다, 바로 돌직구를 날리며 마가복음서는 시작합니다. 예수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태어났다, 그 족보는 어떻다, 그 아기의 탄생을 누가 제일 처음 알았고 누가 제일 처음 방문했고 . . . 그런 얘기 없이 곧 바로 성인이 된 예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세례 요한이 있었고, 그에게서 세례를 받았고, 바로 광야로 갔고, 시험과 유혹이 있었고, 그리고 돌아와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고, 제자들도 불렀다. 그리고 길을 가면서 병자들도 고치고 귀신도 쫓아내고 물론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치고. 마치 들을 내달리는 사자처럼 거침 없는 예수, 곧장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그리스도 예수를 보여줍니다. 인간의 시간 속, 공간 속에 누구보다 살아 있는 한 사람, 그리스도 예수의 모습입니다.

 

  1.  

이 세 복음서의 공통점 중의 하나는 이것입니다.

“13 그 때에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리를 떠나 요단 강으로 요한을 찾아가셨다. 14 그러나 요한은 "내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내게 오셨습니까?" 하고 말하면서 말렸다. 15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지금은 그렇게 하도록 하십시오. 이렇게 하여, 우리가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옳습니다." 그제서야 요한이 허락하였다. 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 그 때에 하늘이 열렸다. 그는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 같이 내려와 자기 위에 오는 것을 보셨다. 17   그리고 하늘에서 소리가 나기를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 하였다.” (마태복음서 3:13-17, 참조/마가복음서 1:9-11; 누가복음서 3:21-22)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

여기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 예수는 그냥 사람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 그 사실을 세례 요한으로부터 예수가 세례를 받던 그때, 하늘이 열리며 그 하늘로부터 들려온 하늘 음성이 알려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 . .

 

“50 예수께서 다시 큰 소리로 외치시고, 숨을 거두셨다. 51 그런데 보아라,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졌다. 그리고 땅이 흔들리고, 바위가 갈라지고, 52 무덤이 열리고, 잠자던 많은 성도의 몸이 살아났다. 53 그리고 그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뒤에, 무덤에서 나와, 거룩한 도성에 들어가서, 많은 사람에게 나타났다. 54 백부장과 그와 함께 예수를 지키는 사람들이, 지진과 여러 가지 일어난 일들을 보고, 몹시 두려워하여 말하기를 "참으로,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하였다.” (마태복음서 27:50-54, 참조/마가복음서 15:37-39; 누가복음서 23:44-47)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하는 그 사실을 말하는 하늘로부터 들려온 하늘의 음성이, 마침내 그 예수가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는 그때 거기 있던 한 사람, 한 이방인 백부장의 말, “이분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라는 사람의 음성으로 고백하는 그 긴 과정이 바로 세 복음서의 내용이라고 해도 그리 지나친 말은 아닙니다. 그리고 마침내 부활을 통해 확증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 그것이 세 복음서가 전하는 진리입니다.

 

  1.  

그런데 요한복음서의 시작은 사뭇 다릅니다.

“1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2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3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니, 그가 없이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다. 창조된 것은 4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의 빛이었다. 5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 (요한복음서 1:1-5)

 

왜일까요? 툭, 툭, 툭, 마치 다트판이나 양궁 과녁으로 연이어 던진 다트 혹은 연거푸 쏜 화살이 한 가운데로 날아가 꽂히고, 또 거기 꽂힌 데 또 꽂히고 꽂힌 데 또 꽂히는 진리의 연발, 진리의 속사포로 요한복음서는 시작할까요? 마치 예수 그리스도가 사실은 누구인가 그 질문 자체가 필요 없다는 듯, 물을 필요도 설명할 필요도 없고, 확인을 해 주고 말고 할 것도 없고, 증거를 대고 말고 할 일도 사실 아니라는 듯, 당연하다는 듯 진리를 토해내고 있습니다.

 

요한은 지금 로마 황제와 헤롯 왕이 통치하고 있던 1세기의 유대 땅이 아니라, 아예 우리를 아주 까마득히 먼 과거, 세상의 맨 처음, 그 태초로 이끕니다. 우리 사람이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때 거기. 제아무리 똑똑한 AI라 해도 도저히 알 수도 없고 그려낼 수도 없는 태초. 어느 시간 속에 계신 그리스도 예수, 어느 한 공간에 계신 그리스도 예수, 인간의 역사라는 제한된 세상에 계신 그리스도 예수를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산 위에 서 있는 위대한 스승 모세의 모습도 아니고, 땅을 박차며 포효하는 사자의 모습도 아니고, 짐을 잔뜩 등에 지고 걷는 언덕을 오르는 황소의 모습도 아닌, 이건 마치 높고 광활한 하늘을 유유히 나르는 여기 낮은 아래를 저기 높은 위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는 독수리의 모습입니다. 땅이라는 인간의 한계, 시간과 공간 그 너머로 날아가는 독수리의 모습입니다.  

 

지금 요한은 우리를 독수리의 날개 위에 다짜고짜 태워 저기 드넓은 바다, 푸른 창공으로, 더 나아가 광대무변의 우주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지금 여기 현재 속에 고개 숙인 우리, 닥친 현실 속에 방황하고 의심하는 우리, 불안해하고 근심하고 걱정하며 두려움 속에 있는 우리를 독수리의 어깨에 태워 멀리 광활한 우주로 던져버립니다.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 3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니, 빛이 생겼다. 4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셔서, 5 빛을 낮이라고 하시고, 어둠을 밤이라고 하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하루가 지났다.” (창세기 1:1-5)

 

창세기 1장 1절, 그 맨 처음으로 우리를 냅다 던져버립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우리에게 말하는 듯 보입니다.

“너는 네가 정말 누구인지 아느냐? 너는 미운 오리 새끼가 아니라, 저 하늘을 맘껏 날아다닐 우아하고 멋진 백조다. 그리고 너는 나를 아느냐. 내가 너를 백조로 창조하였다. 그런데 너는 나를 모른다. 너는 너도 모른다. 나는 나다. 그리고 나는 너를 안다.”

요한은 또한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 보입니다.

“네가 지금 보고 듣고 알고 따르는 그 예수가 누군지 너는 아느냐? 때론 의심 하고 계속 따라서 갈까 말까 멈칫멈칫 주저하는 그 예수가 누군지 너는 정말 아느냐? 왜 내 기도는 내 말을 도무지 들어주시지 않느냐고 투정하고 원망하고 때로는 좌절과 실망 속에 분노를 쏟는 그 예수가 누군지 너는 정말 알고 그러는 것이냐? 믿다 보면 따라 걷다 보면 이렇게 살다 보면 알게 되겠지요, 그렇게 네가 생각하고 있는 그 예수가 정말 누구라고 너는 생각하느냐? 너는 예수를 누구라고 알고 있느냐, 누구라고 믿고 있느냐, 누구인줄 알고 따르고 있느냐?”

 

노년에 도달한 요한이 생의 뒤안길에서 써 내려간 일성입니다.

“1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2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3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니, 그가 없이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다. 창조된 것은 4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의 빛이었다. 5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 (요한복음서 1:1-5)

 

  1.  

“2 전도자가 말한다. 헛되고 헛되다.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 3 사람이 세상에서 아무리 수고한들, 무슨 보람이 있는가? 4 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오지만, 세상은 언제나 그대로다. 5 해는 여전히 뜨고, 또 여전히 져서, 제자리로 돌아가며, 거기에서 다시 떠오른다. . . 8 만물이 다 지쳐 있음을 사람이 말로 다 나타낼 수 없다. 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않으며 귀는 들어도 차지 않는다. 9 이미 있던 것이 훗날에 다시 있을 것이며, 이미 일어났던 일이 훗날에 다시 일어날 것이다. 이 세상에 새 것이란 없다. . . 12 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동안에, 13 하늘 아래에서 되어지는 온갖 일을 살펴서 알아 내려고 지혜를 짜며 심혈을 기울였다. 괴로웠다. 하나님은 왜 사람을 이런 수고로운 일에다 얽어매어 꼼짝도 못하게 하시는 것인가? 14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일을 보니 그 모두가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 . . 17 나는 또 무엇이 슬기롭고 똑똑한 것인지, 무엇이 얼빠지고 어리석은 것인지를 구별하려고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처럼 알려고 하는 그것 또한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은 일임을 알게 되었다. 18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고, 아는 것이 많으면 걱정도 많더라.” (전도서 1:2-5, 8-9, 12-18)

 

세상 모든 것을 다 소유해도 걱정, 아무것이 없어도 걱정. 왕이 되어서도 걱정, 남의 종살이를 해도 걱정. 아는 것이 많아도 걱정, 모르는 것이 많아도 걱정. 아는 것이  많고 지혜도 많으니 그에 따라 근심도 번뇌도 많고, 그 셀 수도 없는 그 많은 번뇌의 뿌리를 찾으려 이리저리 동분서주 지혜를 구해도 알 수 없고. 지혜로운 사람을 찾아도 그 역시 번뇌 속에 제 코가 석자이고. 그렇다면 이번 생은 망쳤나요? 그럼 다음 생이라고 뭐가 달라지나요? 그저 고통의 바다, 고해 그 한가운데 던져진 인생으로 망망대해 낙엽으로 살다 끝이면 될까요?

 

  1.  

빌라도 법정에 서신 예수님께 마지막으로 빌라도가 묻습니다.

“38 빌라도가 예수께 "진리가 무엇이오?" 하고 물었다.” (요한복음서 18:38)

 

진리가 뭘까요? 무엇이 진리일까요?

그때 거기 예수님을 고발한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진리란 뭘까요?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외치던 그 많은 군중들에게 진리란 뭘까요?

그리고 거기 빌라도를 비롯해 주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았던 그 모든 로마 군인들, 십자가에 못박히신 주님을 조롱하고 욕하고 침을 뱉고 돌을 던졌던 사람들, 자신의 죽음이 코 앞인데 자신 역시 십자가에 달려있는데 옆에 계신 예수님께 마지막까지 욕을 퍼부었던 그 강도조차 자유하게 하고 해방시키는 그 진리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들 모두가 정말 알아야 했던 그 진리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리고 지금 여기 여러분과 저에게 진리는 무엇일까요? 그걸 알아야 우리 모두가 자유할 수 있을 텐데. 이 모든 슬픔과 아픔과 고통에서 우리가 놓여날 텐데.

도대체 그 진리는 뭘까요? 내가 잡고 가야 할, 살아야 할, 내 생을 전부 걸어야 할 그 진리.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네 나라는 어디에 있느냐, 네 죄가 무엇이냐, 그 모든 것들을 제쳐두고, 정말 내가 듣고 싶고, 내가 알아야 할 그 진리란 뭘까요? 여기 빌라도 조차 알고 싶었던 그 진리는 도대체 뭘까요?

 

  1.  

중국 고대 철학자 장자, 진리를 찾고 길(道)을 찾았던 장자. 장자의 소요유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머나먼 북녘바다에 큰 물고기(곤어)가 살았는데, 얼마나 큰지, 그 길이가 몇 천리가 되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이 큰 물고기가 큰 새(붕새)가 되었는데, 얼마나 큰지, 그 너비가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이 큰 붕새가 솟구쳐 날면, 하늘 가득히 드리운 구름과 같다. 붕새는 큰 바다 바람을 타고 남녘바다로 날아 간다. 남녘바다는 하늘호수(천지天池)다. . . 붕새가 남녘바다로 갈 때는, 3천 리 파도를 일으키면서 회오리바람처럼 솟구쳐, 9만 리 하늘을 올라 큰 바람을 타고 날아간다. 천지만물이 서로 숨을 쉬어 아지랑이와 먼지가 생기는데도 하늘을  파랗기만 하다. 하늘의 색깔은 파란 것인가, 아득히 멀어서 그렇게 보이는 것일까! 아득한 하늘에서 이 땅을 내려다 볼 때도 그렇게 보일 것이다. . .”

 

그런데 저 아래에 있는 매미와 비둘기는 그런 붕새를 보고 혀를 찹니다.

“우리는 한껏 날아 올라도 기껏 느릅나무와 다목나무에 미치거나, 그것도 실패하는 때가 있는데, 어찌 9만 리를 솟구쳐 올라 남녘으로 간다는 말인가!”

우물 안 개구리. 누가 누구를 보고 혀를 찰까요? 그냥 그렇게 넋을 놓고 살까요? 그냥 그런 신세려니 할까요? 여기 내 팔자가 그렇지 하며 살까요? 그 정도의 삶의 무게를 덜어내 주시려고 그리스도 예수,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을까요? 나의 쇼핑 리스트, 위시 리스트, 나아가 버킷 리스트 해결해 주시기 위해 오셨을까요?  

 

사는 게 너~무 신이 나서, 너~무 재미있어서, 사는 게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어서, 여기가 마치 천국처럼 느껴지고, 이게 천국이 아니면 어디가 천국일까, 그 주체할 수 없는 기쁨과 황홀에 취해 가만히 문 닫고 앉아 성경을 열어 읽는 사람들 물론 있을 것입니다.

나는 사는 게 왜 이리 힘이 들까, 사는 게 왜 이리 고단할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디로 가야 할까, 이 답답함을 누구에게 말할까, 누가 내 편이 되어줄까, 나는 왜 이럴까, . . . 고개 숙인 채로, 마음 접히고 생각 접히고 몸도 접힌 채로 성경을 읽은 사람들이 그러나 더 많을 것입니다.

그 많은 질문들, 갈증, 답답함, 그리고 그 억한 마음 풀 길이 없고, 풀 길을 찾아도 보이지 않고, 그래서 그 살 길을 찾아, 그 풀 길을 찾아 우리는 성경 속으로 들어갑니다. 나의 답답함 누구에게 말할까, 누가 내 편이 되어줄까, . . . 우물 안 개구리로, 한 나무에 매달린 한철 매미로, 이 나무 저 나무 겨우 작은 숲에 갇힌 뱁새로 그렇게 고개 숙인 채 마음 접고 생각 접고 몸도 접고 살아야 할까?

 

아니면 그 진리는 뭘까? 그 길을 뭘까?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그 한가지는 뭘까? 내 삶이 내 존재가 뿌리를 내릴 곳, 내 삶의 닻을 내릴 곳이 어디일까? 온갖 바람에 흔들려도 폭풍 속을 지나도 끝끝내 뒤집히지 않을 수 있는 그 진리는 무엇일까? 누구 믿고 의지하여 여기를 헤쳐 나갈까? 지금 가는 곳은 몰라도 적어도 내가 믿고 따라가는 그 사람, 지금 내가 꽁무니라도 붙잡고 갈 사람, 그 진리는 무엇이고 누구인지 그건 알아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이 번뇌와 고뇌와 수고와 허무에서 내가 자유할 수 있을 텐데. 내가 알아야 할 그 한 가지는 무엇일까?

 

  1.  

여기 그 모든 것을 경험한 요한이 있습니다. 이제 독수리처럼 하늘을 날아오른 요한, 그 높은 곳에서 보는 요한이 있습니다. 이젠 더 큰 새의 날개를 탄 요한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1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2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3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니, 그가 없이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다. 창조된 것은 4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의 빛이었다. 5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 (요한복음서 1:1-5)

 

“그러지 말고 저 하늘을 봐라, 저 바다를 봐라, 저 우주를 봐라. 그리고 그 너머를 봐라. 그 너머에 계신 분을 봐라. 이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한 분, 주님을 봐라.”

그들 모두를 향해 요한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활의 주님을 예배하는데, 그러나 마음 한 구석 불안과 근심과 두려움과 의심이 차마 사라지지 않은 우리에게 요한이 말하고 있습니다. 접힌 채로 있지 말고 고개를 들라고 말합니다. 땅만 보지 말고 하늘을 보라고, 하늘 너머 광활한 우주를 보라고.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그 말씀이 바로 우리 주님 그리스도 예수시다. 그 주님은 맨 처음 하늘과 땅이 생길 그때 거기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 주님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다. 그 주님이 없이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다. 너 역시 그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었고, 그 주님이 바로 너의 빛이다. 그 빛이 어둠 속에 있는 너를 지금 비추고 있다. 지금 헤어나올 구멍이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 너의 그 어둠, 지금 너에게 닥친 그 짙은 어둠, 네가 마주 선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그 어둠은 그러나 세상을 밝혔던 그 빛을 이기지 못한다. 그러니 그만 고개를 들어라. 땅만, 그 어둠만, 그 짙고 어둔 방만 보지 말고, 머물지 말고, 그만 고개를 들고 그만 거기서 나와라. 너는 초라한 존재가 아니라, 모든 것의 첫 시작 그 태초에 계셨던 그 말씀, 그 말씀의 사랑의 결과물이다, 그러니 너는 빛으로 나와, 빛으로 살아라. 은총에 눈을 떠라, 은총 안으로 들어와라.”

 

  1.  

지금 여기 요한복음서 첫 장에 보이는 속사포로 쏟아지는 진리의 폭포수. 진리 중의 진리, 세상 모든 진리를 덮고 품는 한 진리. 모든 우주, 모든 세상, 모든 창조, 모든 사람들 그 한 가운데에 꽂히고 또 꽂히는 모든 진리 위에 진리.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는 것. 말씀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맨 처음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그 사실, 그 진리.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창조되었고, 그 말씀이 아니고는 그 어떤 것도 창조된 것이 없다는 그 사실, 그 진리. 창조된 모든 것은 그 말씀으로부터 생명을 얻었고, 그 생명은 바로 사람에게 빛을 주었다는 그 사실, 그 진리.  

 

그래서 지금 여기 우리 모두가, 죽음을 무릅쓰고 자유롭게 살던 그 바다를 뒤로한 채 거친 물살을 헤치며 오르고 오르는 연어처럼, 죽도록 찾아서 영원히 살 그 진실, 무변광대한 거기 맨 처음, 땅과 하늘이 생겨난 그 맨 처음, 거기에 가 닿는다는 그 진리가 바로 오늘 읽은 여기 다섯 구절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현실에서 고개 들게 합니다. 삶이 아무리 우리를 속이고 희롱하고 얕잡아 보아도, 우리가 고개를 들고 서 있을 수 있는 이유는 그 주님으로 하여 그 주님 안에서 생명 가득한 그리고 자유하다는 것, 우리는 여기 매인 채 그래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것, 그 사실 그 진리 때문입니다.  

고개 숙인 사람을 고개 들게 하는 진리입니다. 내가 왕이다 나는 모든 것을 다 가졌다 내가 세상의 주인다 고개 빳빳히 든 사람을 고개 숙이게 하는 진리입니다. 우리에게 생명과 빛이신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 그리스도 예수, 하나님의 아들이 진리이십니다.

 

  1.  

하나님의 말씀.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그 속내를 우리는 알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람이 알을 걸기를 기다립니다. 그 사람의 말을 통해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속내를 압니다. 그 사람이 하는 눈짓, 손짓, 발짓, 몸짓을 보고 그 사랑하는 사람의 속내를 압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말씀이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창조를 낳은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 표현의 최고치로 드러난 것이 우리 사람입니다. 비록 실수 투성이에 잘못 투성이에 흠결 투성이지만, 그러나 그 사랑은 우리를 용서하는 사랑이고 품어주는 사랑이고 으로 끌어안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으로 오신 말씀이 그리스도 예수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이것이 요한이 지금 말하는 진리입니다. 그 주님이 우리의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십니다. 우리의 어둠을 몰아내는 빛이시고, 우리가 그 빛 안에 있어 빛을 살고 빛이 되어야 합니다.

 

고개 숙일 이유도, 우물 안 가만히 한숨만 내 쉴 일도, 이 나무 저 나무 나 먼저 차지하겠다 연신 옮겨 다닐 이유도 없습니다. 몇 그루 나무 이제 내 것이다, 여기 몇 평 숲속 땅 다 나의 것이다 하며 도끼자루 썩는지 나도 따라 썩는지 모르고 살 일이 아닙니다.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 하나님이신 말씀, 그 말씀이 나를 창조하셨고, 그 말씀이 나를 찾아오셨고, 그 말씀이 나를 소유하셨고, 나는 그분의 것이고 그분은 나의 것이라는 것. 그것이 진리입니다. 그 진리로 나는 여기를 넘어 태초 속으로 영원 속으로 하나님 나라를 살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빌라도조차 알고 싶었던 진리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하나님의 아들.

 

  1.  

말을 해야 아는 우리, 그 사랑의 말씀으로 오신 그리스도 예수, 하나님의 아들,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은총에 눈을 뜰 때입니다. 은총이신 주님께 눈을 뜰 때입니다. 그 은총에 눈을 떠 그 은총에 내가 있어 그 은총을 살고 또한 서로에게 은총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은총에 눈을 뜰 때입니다. 여기 그 은총에 눈을 뜬 한 신앙인의 고백입니다. 구상 시인의 시, <은총에 눈을 뜨니>입니다.

 

1

이제사 비로소

두 이레 강아지만큼

은총에 눈이 뜬다.

 

이제까지 시들하던 만물만상이

저마다 신령한 빛을 뿜고

그렇듯 안타까움과 슬픔이던

나고 죽고 그 덧없음이

모두가 영원의 한 모습일 뿐이다.

 

이제야 하늘이 새와 꽃만을

먹이고 입히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공으로 기르고 살리심을

눈물로써 감사하노라.

 

아침이면 해가 동쪽에서 뜨고

저녁이면 해가 서쪽으로 지고

때를 넘기면 배가 고프기는

매한가지지만

 

출구가 없던 나의 의식 안에

무한한 시공이 열리며

모든 것이 새롭고

모든 것이 소중스럽고

모든 것이 아름답다.

 

 

2

이제는 신비의 샘인

목숨의 시간들을

헛된 욕망으로 흐리고 더럽혀서

연탄빛 폐수로 흘려보내진 않으련다.

 

나의 삶을 감싸고 있는

신령한 은총에 눈 떴으매

현재로부터 영원을 살며

진선미(眞善美)의 실재를

스스로 증거하여 보이리라.

 

지난날 나는 똑똑히 보아 왔노라.

눈에 보이는 사물만을 받들어 섬기고

눈에 보이지 않는 도리(道理)는 외면하던

모든 소유의 무상한 파탄을!

 

그리고 나는 또한 보아 왔노라.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굳게 안고서

영원의 깊은 요구에 응답하는

마음 가난한 이들의 불멸의 모습을!

 

이제 나에게는 나의 무능과

무력도 감사하고

앞으로 살기에 필요로 하는 것은

 

오직 마음의 순결,

그 하나뿐이로다.

 

이 시인의 고백이 여러분과 저의 고백이 되고 기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