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서는 만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만남에 따르는 고백과 증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나는 누구를 만났다, 내가 만난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이런이런 사람이었다. 요한복음서의 패턴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서는 만남과 고백과 증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 이 글은 생명의 말씀에 관한 것입니다. 이 생명의 말씀은 태초부터 계신 것이요, 우리가 들은 것이요, 우리가 눈으로 본 것이요, 우리가 지켜본 것이요, 우리가 손으로 만져본 것입니다. 2 이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영원한 생명을 여러분에게 증언하고 선포합니다. 이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 우리는 여러분도 우리와 서로 사귐을 가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귐입니다. 4 우리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우리 서로의 기쁨이 차고 넘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요한 1서 1:1-4)
증언, 증인의 입에서 나오는 그 말, 증인의 고백과 선포가 증언입니다. 나에게 닥칠 수 도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하는 것이 증언입니다. 법정에서 하는 증언, 그것은 법적 효력을 갖습니다. 증인 보호 신청이 필요할 정도로 위험이 따릅니다. 책임을 지는 것이고, 목숨을 거는 것이 증언이고, 그리고 다른 누군가의 증언이 그 증언의 진실성을 확인시켜줍니다.
“6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다. 그 이름은 요한이었다. 7 그 사람은 그 빛을 증언하러 왔으니, 자기를 통하여 모든 사람을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8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그는 그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 . 15 요한은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쳤다. "이분이 내가 말씀드린 바로 그분입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 나보다 앞서신 분이라고 말씀드린 것은, 이분을 두고 말한 것입니다. 그분은 사실 나보다 먼저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서 1:6-8, 15)
사도 요한의 증언은 세례 요한의 증언으로 이어집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입니다.
“19 유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 지파 사람들을 요한에게 보내어서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어 보게 하였다. 그 때에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였다.”
“34 그런데 나는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하였습니다." (요한복음서 1:19, 34)
그 모든 증언은 만남을 통해 나타납니다. 만나지 않고는 증언할 수 없고,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만남이 깨달음을 낳고, 깨달음은 고백을 낳고, 고백은 증언을 낳고, 그래서 만남은 나를 관객이나 구경꾼이 아닌 증인, 즉 사건의 참여자가 되게 합니다. 그래서 만남은 그 사건의 관계자 중 한 사람으로 살아가게 합니다. 세상의 중심을 뒤흔드는 사건의 한 명의 관계자로 나를 살게 합니다. 세상의 중심에 나를 있게 만듭니다. 그러나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유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 지파 사람들을 요한에게 보내어서 물어 보게 합니다. "당신은 누구요?" 요한이 대답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오." 그들이 다시 요한에게 묻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누구요? 엘리야요?" 요한은 "아니오" 하고 대답합니다. "그럼 당신은 그 예언자요?" 그들이 다시 묻습니다. "아니오" 하고 요한이 대답합니다. 그들이 또 묻습니다. "그럼 도대체 당신은 누구요? 우리를 보낸 사람들에게 우리가 대답할 말을 좀 해주시오. 당신은 당신 자신을 뭐라고 말하시오?" 참, 답답합니다, 묻는 그들이나 답하는 요한이나. 예루살렘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빈 손으로 갈 수도 없는 그들이고, 그렇다고 거짓을 말할 수도 없는 요한이고.
그런데 왜 자꾸 요한이 누구냐고 물을까요? 사실 요한이 누군지 다 아는데. 뭘 알고 싶어 그럴까요?
지금 예루살렘에서 여기 요단 강으로 세례 요한을 찾아온 사람들은 자신들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아니 적어도 세상의 중심 안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들을 요한에게 물어보라고 보낸 그 사람들은 자기들이 세상의 중심, 적어도 유대의 중심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이고, 거기 하나님의 성전이 있으니 분명 세상의 중심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있는 자신들이, 그리고 그 성전을 좌지우지 하는 자신들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세상의 중심인 사람들입니다. 말로는 하나님이라고 했지만, 아닙니다. 이미 그들은 자신들이 세상의 중심인 사람들입니다. 화려한 도시 거기 살고 있는 그들은 세상의 중심에 있다고 자부합니다.
로마 황제도 그랬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자랑스레 말을 합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고, 로마는 모든 세상으로 통한다, 그래서 로마는 세상의 중심이고, 황제는 그 중심의 중심이다 말합니다. 로마 총독이든 로마의 권력자들이든 그 권력 얻어보겠다 이리저리 날뛰는 헤롯왕을 비롯한 세상의 자그마한 왕들은 죄다 그 세상의 중심으로 들어가려 애를 씁니다. 그 세상의 중심에서 비롯된 권력이다, 자랑스레 여깁니다. 그런데 여태 자기들이 알고 있던 세상의 중심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직감합니다. 세상의 중심이라고 흔들림 없이 믿고 있었던 거기 예루살렘 그리고 저기 로마.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과 저기 로마 황제의 왕궁. 거기 그 중심에 내가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은 지금 뭔가 그 세상의 중심에 균열이 가고 있다는 것, 그 세상의 중심을 무너뜨릴 땅의 진동을 직감합니다.
세례 요한이 태어나자 아버지 사가랴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이렇게 예언했다고 누가복음서는 전합니다.
“68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찬양받으실 분이시다. 그는 자기 백성을 돌보아 속량하시고, 69 우리를 위하여 능력 있는 구원자를 자기의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다. . . 76 아가야, 너는 더없이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릴 것이니, 주님보다 앞서 가서 그의 길을 예비하고, 77 죄 사함을 받아서 구원을 얻는 지식을 그의 백성에게 가르쳐 줄 것이다. 78 이것은 우리 하나님의 자비로운 심정에서 오는 것이다. 그는 해를 하늘 높이 뜨게 하셔서, 79 어둠 속과 죽음의 그늘 아래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게 하시고,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 (누가복음서 1:68-69, 76-79)
그런데 그 다음 구절이 의미심장합니다.
“80 아기는 자라서, 심령이 굳세어졌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나는 날까지 광야에서 살았다.” (누가복음서 1:80)
왜 세례 요한은 사람들 앞에 서기까지 광야에서 살았을까요? 왜 세례 요한은 거길 애써 찾아가서 거기에 있었을까요? 무엇을 위해, 무엇을 보기 위해, 무엇을 찾기 위해, 거기에 갔고 거기서 살았을까요? 요한은 거기서 무엇을 보았을까요? 누구를 만났을까요? 어떤 만남이 있었을까요?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사람들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7 이들이 떠나갈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을 두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8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은 왕궁에 있다.” (누가복음서 11:7-8)
Death Valley, 끝없이 펼쳐진 사막. 뜨겁고 황량하고 정말 무엇이 없는 죽음과 같은 사막, 광야입니다.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마른 풀 뭉치가 무슨 서부영화 한 장면처럼 길 위를 굴러다니고, 서부 영화 속 황야의 무법자도 피하고 싶은 곳입니다.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은 왕궁에 있다.”
몇 시간을 달리면 나타나는 사막 한 가운데 자리한 화려한 라스베가스. 설마 그 유대 사람들이 그걸 보기위해 광야를 찾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9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를 보려고 나갔더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렇다. 그는 예언자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다. 이 사람을 두고 성경에 기록하기를, 10 '보아라, 내가 내 심부름꾼을 너보다 앞서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닦을 것이다' 하였다.” (누가복음서 11:9-10)
아닙니다. 사람들은 예언자를 보러 갔습니다. 그들은 길을 잃은 사람들, 목자를 잃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광야를 찾았습니다. 그 길을 찾기 위해, 그 목자를 찾기 위해 광야에 갔습니다.
“76 아가야, 너는 더없이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릴 것이니, 주님보다 앞서 가서 그의 길을 예비하고, 77 죄 사함을 받아서 구원을 얻는 지식을 그의 백성에게 가르쳐 줄 것이다.” (누가복음서 1:76-77)
그런데 세례 요한은 왜 굳이 광야로 갔을까요? 왜 요한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광야로 갔을까요? 예루살렘에 가서 바울처럼 거기 유명한 율법학자들에게서 배우지 않고, 왜 제사장들에게 배우지 않고, 자기 아버지도 제사장인데 그게 어려운 일도 아닐 텐데. 굳이 광야로 왜 갔을까요? 왜 아버지 사가랴와 어머니 엘리사벳은 요한이 광야로 가게 두었을까요?
화려한 도시. 도시는 우리 사는 세상의 중심이 된 지 오래입니다. 도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세상의 중심이다. 그리고 그 도시 안에 살고 있는 너 역시 세상의 중심인 내 안에 살고 있으니 너 역시 세상의 중심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깨닫습니다 그것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나는 세상의 중심은 고사하고 그 언저리에도 끼지 못한 채, 중심에서 한참 밀려난 저기 어느 변두리, 빛도 찾아주지 않는 한쪽 구석에 나는 있었을 뿐. 이제 곧 중심으로 들어갈 것이다, 이미 난 중심에 있다, 그렇게 내가 생각하고 있었을 뿐, 그렇게 최면에 걸려 있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도시라는 세상의 중심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 그 안에서 사는 것, 더 깊숙한 정말 중심에 서는 것, 그래서 내가 세상의 중심이 되는 것, 그건 목숨을 건 경쟁이고 필사적인 생존의 문제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내가 세상의 중심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역시 깨닫습니다.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여기가 정말 세상의 중심일까, 세상의 중심에 나는 있을까, 세상의 중심이 나는 될 수 있을까? 사는 게 너무 힘에 부치고, 힘이 들고, 그래서 지치고 답답하고, 그래서 외롭고 서글퍼지다 문득 떠올라 고개를 들어 가을 밤하늘을 올려보지만, 거기 별은 도무지 보이질 않습니다.
도시 한 복판에 서서 밤하늘을 올려다보아도 별을 보기 힘듭니다. 도시의 밤하늘에 별이 사라졌습니다. 별을 보기 쉽지 않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도시의 밤이 너무 밝기 때문이랍니다. 밤이 너무 밝아 별이 보이질 않는다고 합니다. 별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도시의 불빛이 너무 밝아 별빛을 압도하기 때문이랍니다. 사실 도시는 이제 별이 필요가 없는 곳이 되었습니다. 도시, 세상의 중심이 된 지 오래입니다. 낮이나 밤이나 언제나 도시는 밝고 환하고 찬란합니다. 굳이 별빛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여기가 세상의 중심이니 어디 다른 데 굳이 찾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별을 보며 길을 찾을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펑펑 밤하늘에 터지는 불꽃이 아니고서는 도무지 도시의 밝고 화려한 밤을 이겨낼 재간이 없습니다.
별을 보려면 불을 꺼야 하는데. 진짜 빛, 참 빛을 보려면 가짜 빛, 거짓 빛을 꺼야 하는데, 우린 그러질 못합니다. 도시는 그걸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정말 별을 연구하고 우주를 연구하는 별 관측소는 사막에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막, 그 광야는 별을 보는 곳입니다. 정말 세상의 중심이 어디일까, 나의 중심은 어디일까, 그걸 깨닫는 곳입니다. 또한 솔직한 나를 만나는 곳입니다. 맨 얼굴의 나를 직면하는 곳입니다. 사막, 광야는 그래서 시험과 유혹의 장소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광야로 가신 이유입니다. 나의 중심, 세상의 중심을 다시 확인하고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시기 위해 거기 가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아들이신 주님의 중심이고, 하나님 아버지를 경배하는 것이 아들이신 주님의 중심이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바로 세상의 중심, 그리고 그 아들 그리스도의 중심인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시기 위해서 거기 가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세상의 중심이신 하나님을 광야에서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세상의 중심으로부터 주님이 오실 것을, 그리고 그 주님은 그 세상의 중심으로 가는 길이 되실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길, 진리의 길, 세상의 중심으로 가는 길로 오실 한 분, 그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 내가 받은 사명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거기서 돌아와 지금 요단 강에서 사람들에게 그 주님을 맞을 채비를 하게 합니다. 회개의 세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세례 요한이 그 세상의 중심이 아닐까 오해하고 있습니다.
“혹시, 이 세례 요한이 바로 그 주님이 아닐까, 오신다고 했던 그리스도, 즉 메시아가 아닐까, 적어도 선지자 엘리야가 아닐까. 그래 이 세례 요한이 이제 세상의 중심이 아닐까. 저기 예루살렘이 아니라, 저기 로마가 아니라, 헤롯 왕이 아니라 로마 황제가 아니라, 이 요한이 우리의 정말 왕이 아닐까, 메시아가 아닐까.”
“아니다, 나는 세상의 중심이 아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 이 예수가 바로 세상의 중심으로 가는 길이며, 또한 세상의 중심이다. 나도 너도 어느 누구도 아니다. 로마도 로마의 왕궁도, 거기 제사장들도 헤롯 왕도 빌라도 총독도 로마 황제도 세상의 중심이 아니다. 이제 그 시온 산도, 예루살렘도, 예루살렘 성전도 더 이상 세상의 중심이 아니다. 저기 그리스도 예수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말씀, 살아계신 말씀이 세상의 중심이다. 저기 하나님의 어린 양이 바로 세상의 중심이다.”
우리는 누구나 무대의 중심에 서려고 합니다. 일종의 병입니다. 누구나 걸리는 병입니다. 무대 한가운데, 정중앙에 서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어떤 상황이든 한가운데에 있으려고 합니다. 한가운데가 주인공의 자리인 줄 압니다. 무대 한가운데가 무대의 중심인 줄 압니다. 거기 서야 내가 무대의 중심이 되는 줄 압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너도 그렇고 우리 모두가 그렇습니다. 내가 중심이어야 하는 무대, 그 무대의 중심에 서고 싶은 나의 욕망들이 부딪혀 무대는 점점 엉망이 되어갑니다. 너도 나도 내가 중심이고, 중심이 되려고 무대 중심을 놓고 싸우니 배는 점점 산꼭대기로 올라갑니다.
저기 보이는 무대의 한가운데 선다고 하여, 내가 무대의 중심이라고 우긴다 하여 내가 무대의 중심이 되지 않습니다. 주어진 상황, 주어진 자리, 주어진 역할, 주어진 장면에서 내가 그 역할을 충실히 해낼 때 나는 무대의 중심이 됩니다. 굳이 무대 한가운데를 고집하지 않고, 오히려 거기를 비운 채, 거기 서겠다 욕심을 부리지 않은 채, 내 일을 하고 내 역할을 제대로 충실히 하는 배우가 선 거기가 무대의 중심이 되고, 그 배우는 그 무대의 중심이 됩니다. 그리고 그 무대 자체 모두가 중심이 됩니다.
여기 세례 요한은 내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다, 저기 주님이 세상의 중심이다, 주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옆으로 비껴 섭니다. 뒤로 물러납니다. 나의 중심, 세상의 중심을 스스로 비우고 있습니다. 누가 세상의 중심인지 아는 것,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그 일 그 역할은 그 중심이신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 그 일이 바로 내가 세상의 중심이신 주님 그 안에 서는 것이라는 것을 요한은 알고 있습니다. 내가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거기 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중심 그리고 나의 중심을 주님께 드리는 것, 그것이 내가 정말 중심에 서는 것임을 그는 광야에서 깨달았습니다.
나는 길이 아니라, 그 길을 걷는 사람일 뿐. 나는 하늘의 해와 달이 아니라, 그 하늘의 해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 그러나 낮에는 그 해의 은총을 받고, 밤에는 그 달의 은총을 받는 것, 그것이 세상의 중심에 서는 것이고, 세상의 중심으로 사는 것임을 깨달은 세례 요한입니다.
요한이 광야에서 만난 진리, 그리고 여기 요단 강가에서 만난 진리, 그리스도 예수, 하나님의 어린 양, 그 주님을 가리키는 손가락인 나, 요한. 나는 세상의 중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고, 나는 그 중심으로 향하는 길을 예비하는 사람이다. 나는 내가 세상의 중심이 되는 길이 아니라 세상의 중심으로 가는 길 위에 있고, 또한 그 길을 가고 있다. 바로 하나님의 무대 위에 선 요한입니다. 나를 비우고, 내 자리를 비우고 뒤로 물러나 주님을 내 앞에 모시고, 내 안에 모십니다. 내가 뒤로 물러난 자리에 주님이 서시고, 내가 비운 곳을 주님이 채우시니, 내가 선 자리는 빛으로 환하고, 내가 비운 자리는 빛으로 충만합니다.
무대 한가운데 서려고 하고, 무대 위에 뭔가를 채우려 하고. 그래야 내가 중심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 무대가 무섭고 두렵기 때문입니다. 구석으로 밀려날까 무섭고 쫓겨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대 그 한가운데 서야 하는데, 그 무대를 꽉 채워야 하는데, 내 인생을 가득 채워야 하는데, 내가 중심에 있어야 하고 내가 중심이 되어야 하는데. . . 나중에 깨닫습니다, 무대도 인생도 그렇게 채울 수 없다는 것, 내가 그렇게 해서 중심에 설 수 없다는 것을.
무대 위가 비어 보인다, 내 삶이 비어 보인다, 무엇이 없어 보이고, 텅 비어 보이고, 그래서 무엇을 가득 그 무대 위에 가져다 올려놓는다 해서, 내 삶을 자꾸 무엇으로 채운다 해서, 정말 무대가 꽉 차고 내 삶이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나중에 깨닫습니다. 틈 없이 그 사이가 보이지 않을 만큼 아무리 채우고 채워도 그저 무거워질 뿐. 나는 나를 무대의 중심으로 여길 뿐, 혹은 누구에게 그렇게 보일 뿐. 중심처럼 보이는 거기, 주인공으로 보이는 나. 그러나 뒤를 돌아보면 무대 위에는 그림자만 길게 있을 뿐. 내가 쌓아놓은 것들 역시 그림자들만 여기저기 있을 뿐.
무엇이 가득한 창고 안에는 빛이 들어갈 자리는 없습니다. 텅 빈 방에 빛이 머뭅니다. 무엇으로 가득 채운 방에 빛은 그저 쌓아놓은 물건들의 겉만, 그 위만 비추고, 그래서 빛은 공중에 맴 돌 뿐, 그 안으로 머물지 못합니다. 빛은 겉돌기만 하고 무엇으로 가득 채운 창고 같은 무대와 방을 빛은 환하게 비추지 못합니다. 아무리 이런저런 조명을 해도 겉으로 화려하게 보일 뿐. 내 눈에 보이지 않는 저 아래, 꼭꼭 숨긴 그 뒤, 거기 그림자와 어둠만 가득합니다.
내가 한 발 물러나 있을 때, 비로소 그 중심이 보입니다. 무대에서 벗어나 객석에 앉아 있을 때 비로소 그 무대의 중심이 보입니다. 내가 있는 세상, 내가 지금 살아가는 그 드라마, 내가 오른 그 무대는 하나님께서 사랑의 말씀으로 창조하신 세상이고, 그 말씀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그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구원의 드라마이고, 그 말씀이 살아있는 빛으로 직접 오신 무대입니다. 그 빛이 비추고 있는 곳이 중심이고, 그 빛 속에 서 있는 나는 세상의 중심에 서 있는 것입니다. 내가 우긴다고 해서 내가 세상의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해서 거기가 무대의 중심이 아닙니다.
“세상 한 구석 변두리 구석진 곳, 조명도 겨우 가 닿는 거기, 초라해 보이고 연약해 보이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 그가 세상의 중심이고 그가 지금 서 있는 곳이 무대의 중심이다. 나도 아니고, 너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니고 로마도 아니다. 저기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 나사렛 예수, 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며, 사람의 아들이며, 우리의 구원자다.”
이것이 세례 요한이 만난 하나님,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고백이고 증언입니다.
중심을 찾기 위해, 나의 중심을 버려야 합니다. 나는 로미오가 아니고 줄리엣이 아니다. 주님이 나의 로미오이고 줄리엣이다. 그럴 때 비로소 나는 주님으로 인해 주님의 로미오가 되고, 주님의 줄리엣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있는 여기 이곳은 주님의 극장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극장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무대 위에 세우셨습니다. 내가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그 역할에 충실한지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 보십니다. 나의 믿음을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지 보십니다. 그분에게 나는 로미오이고 줄리엣입니다.
지금 무대 한가운데 주인공인 듯 서 있는 요한이 무대의 중심인 줄로 알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그는 저기 구석을 가리키며 증언합니다.
“보시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무대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다고 주인공이 아닙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신 지금 여기가 무대 중심, 세상의 중심입니다. 그리고 그 무대의 중심, 세상의 중심이신 주님이 내 곁에 계시니, 나는 무대의 중심, 세상의 중심에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어린 양, 그 주님의 중심이 여러분과 제 곁에 계십니다. 주님의 눈길이 가 있는 곳은 여러분과 저입니다. 주님의 마음이 머물고 있는 곳은 여러분과 저입니다. 우리의 중심은 주님이십니다, 우리 사는 세상의 중심은 주님이십니다. 그 믿음, 그 고백, 그 증언을 하고, 그 믿음과 고백과 증언을 충실히 살아가는 우리, 그 주님 곁에 있는 우리는 주님에게 세상의 중심입니다.
“보시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우리를 위해 오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십니다. 세상의 참 중심에서 우리가 살라고 오셨습니다. 텅 빈 방에 빛은 머물고, 텅 빈 무대는 빛으로 가득 채워집니다.
“23 그리고 예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려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24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25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를 잃거나 빼앗기면,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누가복음서 9:23-25)
가득 채운 너의 방을 비추라, 가득 채운 너의 무대를 비우라는 것입니다. 그것들을 비워야 주님의 은총의 빛이 들어가 머물고 또한 그 은총의 빛으로 가득 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 바로 증인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내가 만난 주님을 증언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쉽지 않습니다. 십자가입니다. 그러니 위험이 따릅니다. 그러나 증인 보호 신청이 이미 되어 있습니다.
“18 예수께서 다가와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서 28:18-20)
내가 너와 항상 함께 하겠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증인 보호를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32 . . . "나는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이분 위에 머무는 것을 보았습니다. 33 나도 이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게 하신 분이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성령이 어떤 사람 위에 내려와서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임을 알아라' 하셨습니다. 34 그런데 나는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하였습니다." (요 1:32-34)
텅 빈 방에 빛은 머물고, 텅 빈 무대 위에 빛은 가득합니다. 텅 빈 마음, 가난한 마음에 빛이신 주님이 오셔서 가득 채우십니다. 빛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우리의 삶을 가득 채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