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입니다. 좋다 좋다 해도 여름은 한철이고, 덥다 덥다 해도 여름에 끝은 있고, 설마 설마 해도 가을은 왔고, 싫다 싫다 해도 겨울은 올 것입니다. 혹시 가을 타십니까? 나는 가을 안 탄다 해도, 가을비 점점 잦아지고, 아침 저녁으로 스산한 가을 바람이 불고, 길 위에 낙엽이 구르는 것을 보다 보면, 나도 모르게 “아, 가을이구나” 툭 입 밖으로 나옵니다.
밴쿠버의 봄, 그 벚꽃은 피었다 싶게 바로 지는 때가 많아 제대로 느끼기 쉽지 않은데. 그나마 밴쿠버의 가을, 그 낙엽은 그래도 조금은 더 오래 우리 곁에 머뭅니다. 낙엽이 쌓이는 족족 쓸어 담지 않는 시청 청소 공무원들의 배려인지는 몰라도, 골목길 낙엽들은 쌓여 우리 곁에 꽤 오래 머뭅니다. 있는 곳 사는 곳 주변 여기 저기 골목길을 걷다가 만나는 밴쿠버의 가을은 제법 그 맛이 납니다.
학교 교정, 거기 꽤 나이가 든 은행나무가 서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봄과 여름 그 한 학기가 지난 가을이었습니다. 밤새 가을비가 내린 그 다음 날 아침, 노랗게 물든 은행잎들이 가을비에 흠뻑 젖어 무거웠는지 가벼운 바람에도 툭툭 떨어져, 그 나무 아래 밤새 주차해 놓은 자동차를 온통 노랗게 덮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자동차도 그리고 검은 아스팔트 도로도 온통 노랗게 변했고, 노란색 사이로 자동차의 검은 바퀴만 보였습니다. 그때 이후로 저에게 가을은 늘 그렇게 다가옵니다. 노란 은행잎들.
가을 우체국 앞에서 그대를 기다리다
노란 은행잎들이 바람에 날려가고
지나는 사람들 같이 저 멀리 가는 걸 보네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오래 남을까
한여름 소나기 쏟아져도 굳세게 버틴 꽃들과
지난 겨울 눈보라에도 우뚝 서 있는 나무들 같이
하늘 아래 모든 것이 저 홀로 설 수 있을까
가을 우체국 앞에서 그대를 기다리다
우연한 생각에 빠져 날 저물도록 몰랐네
- <가을 우체국 앞에서> 작사, 작곡 / 김현성 & 노래 / 윤도현
키 큰 은행나무 한 그루 서 있고, 그 뒤에 가을 우체국이 보입니다. 도로 양옆에 은행나무들이 길게 줄을 서 있고, 그 사이에 가을 우체통이 놓여 있습니다. 가을 우체국 그리고 가을 우체통 그 앞을 서성이는 한 남자, 혹은 한 여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손에 편지가 들려 있습니다. 날은 저무는데 언제까지 저러고 있을지, 어쩌자고 그 손에 쥔 편지를 보내지 못하는지. 가을 우체국 앞 은행나무 거기 봄과 여름동안 수많은 사연들로 노랗게 익어간 은행잎들은 그 익은 사연들이 너무 무거워 불어오는 가을 바람에 떨어져 우체국 앞을 서성이던 그 사람과 함께 저 멀리 사라져갑니다.
가을 우체국 앞에서 날 저물도록 그대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잘 지내십니까, 보고싶습니다, 미안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그 내 속마음을 노란 은행잎과 함께 가을 편지에 써 넣어 우체통에 넣는 것이 나을 텐데. 가을 우체국 앞에서 마냥 기다리는 것, 그게 답은 아닐 텐데. 그렇게 가을 가고, 겨울 오고. 다시 맞은 봄 무엇을 심고, 뜨거운 여름 땀 흘려 버티다 또 가을 오면, 다시 가을 우체국 앞에서 그대를 기다리고. 그렇게 또 보내지 못한 사연들로 나는 노랗게 물들고 무거워져 가을 바람에 떨어진 은행잎으로, 지나는 사람들과 함께 저 멀리 사라져버리고. 언제까지 나는 그래야 할까요?
그렇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건네시는 예수님의 첫 말씀은,
“너희는 무엇을 찾고 있느냐?”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오래 남을까, 한여름 소나기 쏟아져도 굳세게 버틴 꽃들과, 지난 겨울 눈보라에도 우뚝 서 있는 나무들 같이, 하늘 아래 모든 것이 저 홀로 설 수 있을까’
세상 누구보다 무엇보다 아름답게 태어난 나와 너, 그리고 우리인데. 하지만 이렇게 나와 너는, 그리고 우리는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까? 한여름 쏟아지는 소나기도 버텨냈고, 겨울 눈보라도 이겨냈는데. 하지만 이렇게 나와 너는, 그리고 우리는 홀로 얼마나 오래 버텨낼 수 있을까?
불안과 걱정과 두려움 속에 있는 우리에게 건네신 예수님의 첫 말씀은,
“너희는 무엇을 찾고 있느냐?”
‘노란 은행잎들이 바람에 날려가고, 지나는 사람들 같이 저 멀리 가는 걸 보네’
나와 너, 그리고 우리의 생(生)이 그렇게 온갖 사연들로 무겁게 익어간 노란 은행잎으로 떨어져, 지나는 사람들과 함께 불어오는 바람에 날려 저 멀리 속절없이 그냥 떠나가게 그냥 내버려둘까?
예수님을 따른다 하면서도 이게 맞나 싶은 우리에게 건네시는 예수님의 첫 말씀은,
“너희는 무엇을 찾고 있느냐?”
‘너희는 무엇을 찾고 있느냐?’ 나이가 많든 적든 무조건 반말투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으로 번역을 해서 그렇지, 주님은 사실 그러시지는 않으셨을 텐데. 겸손하시고 온유하신 예수님이면 아무에게나 다짜고짜 반말을 하시지는 않았을 텐데. 오히려 주님은 어린 아이를 비롯한 모든 힘 없고 아프고 가난하고 별 볼일 없는 사람들, 그리고 제자들에게 존댓말을 하지 않으셨을까? 외려 나 잘났다, 힘 있다, 돈 많다, 우쭐대고 으스대고 거만한 사람들에게는 일부러 대놓고 반말을 하지 않으셨을까? 그게 저의 생각입니다.
“너희는 무엇을 찾고 있느냐?”
저 같으면 지레 겁먹고 제대로 답을 하지 못했을 것 같아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바꿔 보았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찾고 있습니까? 어르신께서는 무엇을 찾고 계십니까? 선생님께서는 무엇을 찾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찾고 계십니까?”
나를 배려한 듯 싶어 주눅 들지 않아 내 속에 있는 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찾고 계십니까?”
이 질문은 내가 ‘지금’ 무엇을 찾고 있는지를 넘어 ‘지금까지’ 나는 무엇을 찾고 있었는지를 묻습니다. 그리고 내가 찾고 있는 그 ‘무엇’이 정말 무엇인지 나는 알고 있는지, 나는 제대로 그걸 알고 그 ‘무엇’을 찾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 ‘무엇’을 나는 지금도 찾고 있는지를 묻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무엇을 찾고 계셨고, 또 지금 찾고 계십니까? 무엇을 원하고 바라고, 또한 기도하고 계십니까?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
세례 요한의 그 말을 듣고 주님을 따라는 가는데, 도대체 나는 그 주님에게서 무엇을 찾고,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바라고, 또 무엇을 구하는 것일까요?
주님께서 묻습니다.
“당신들은 무엇을 찾고 있습니까? 왜 나를 따라오는 것입니까? 나에게서 무엇을 찾고 있습니까?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까?”
나는 무엇을 찾고 있는가? 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무엇을 찾고 있는가? 나는 주님으로부터 무엇을 바라고 원하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나는 나의 온 생을 통해 찾는 것은 무엇인가? 가볍게 툭 답을 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두 제자의 대답이 의외입니다.
“선생님,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왜 그걸 물을까요? 왜 그게 알고 싶을까요? 설마,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준다, 그 슬픈 광고문 때문일까요? 이 예수가 어디 사는지를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나는 단번에 알 수 있다, 그래서 그걸 물은 걸까요? 그럴리가요. 아닙니다. 그건 유대 바리새파 지도자 중 한 사람인 니고데모와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1 바리새파 사람 가운데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유대 사람의 한 지도자였다. 2 이 사람이 밤에 예수께 와서 말하였다. "랍비님,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면, 선생님께서 행하시는 그런 표징들을, 아무도 행할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서 3:1-2)
이 두 제자는 가을 우체국 앞에서, 가을 우체통 앞에서 서성대다 가을비와 가을 바람에 떨어진 은행잎, 지나는 사람들에 섞여 속절없이 사라지는 은행잎이 되기를 거부한 사람들입니다. 머뭇거리다 부치지 못한 편지가 아니라, 우체국 안으로 들어가 우체통 안으로 넣은 편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그 사람에게 보내진 편지가 되고 싶은 사람들입니다. 당신이 계신 곳, 당신이 지금 머무시는 곳에 내가 가겠습니다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지금 어디에 머물고 계십니까 하고 물은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들의 그런 속내를 아십니다. 나를 너무 잘 아시는 주님, 나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이미 아시는 주님이십니다.
“1 주님, 주님께서 나를 샅샅이 살펴보셨으니, 나를 환히 알고 계십니다. 2 내가 앉아 있거나 서 있거나 주님께서는 다 아십니다. 멀리서도 내 생각을 다 알고 계십니다. 3 내가 길을 가거나 누워 있거나, 주님께서는 다 살피고 계시니, 내 모든 행실을 다 알고 계십니다. 4 내가 혀를 놀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주님께서는 내가 하려는 말을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시편 139:1-4)
그 주님은 내가 차마 부치지 못한 연애 편지, 그러나 내가 용기를 내어 부친 편지, 그래서 내가 보낸 그 편지, 그 고백 편지를 받고 열고, 읽고, 그래서 마침내 나에게 답장으로 오신 사랑, 가을 우체국 앞에서 내가 기다렸던 그 사랑으로 오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 주님이 바로 내가 기다렸던 그 사랑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걸 알기 위해서 그 주님이 계신 그 곳에 내가 가야 합니다. 가서 보아야 합니다. 가서 만나야 합니다. 그러니 너는,
“와서 보아라.”
“당신은 무엇을 찾고 있습니까?”
그래서 내가 거기 가서 보고 싶고 찾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 그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거기 가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발견하느냐 하는 것은 내가 ‘무엇을’ 보기 위해, ‘무엇을’ 찾기 위해 거기에 갔느냐 하는 것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사는 곳이 그 사람을 말해준다는 생각으로 갔다면 나는 겨우 그 장소만 볼 것이고, 그래서 그 장소에 살고 있는, 머물고 있는 그 누구를 보기만 할 뿐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이 말한 그 ‘하나님의 어린 양’, 나의 모든 짐과 수고와 고난과 고통과 불안과 걱정과 근심과 두려움과 좌절과 실패와 참담함과 죄와 죽음과 어둠, 그 모든 것들을 지고 가는 그 ‘하나님의 어린 양’을 만나기 위해 간 것이라면 나는 그 세례 요한이 말한 바로 그분을 만날 것입니다.
‘당신은 무엇을 찾고 있습니까’ 그 질문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찾고 있는가? 나는 무엇을 찾아 여기까지 왔는가? 그리고 나는 무엇을 찾고자 주님을 따라가고 있는가? 평생에 걸쳐 나 자신에게 묻고 또 물어야 하며, 나는 그 질문에 답을 하고 또 해야 합니다.
여기 두 제자는 주님이 계시는 곳을 보고 그 날을 주님과 함께 지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서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 시몬 베드로의 형제인 안드레가 제일 먼저 한 것은 자기 형 시몬을 만나 그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습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는 시몬을 예수님께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를 보시고,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는 너를 게바, 즉 베드로라 부르겠다” 하십니다. 그리고 이 만남이 계기가 되어 결국 베드로와 안드레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18 예수께서 갈릴리 바닷가를 걸어가시다가, 두 형제,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와 형제간인 안드레가 그물을 던지고 있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9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나는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삼겠다." 20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마태복음서 4:18-20)
아니, 어떻게 나를 따라오너라, 그 한 마디에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갈 수 있었을까? 역시 주님의 사도는 다르긴 다르다가 아닙니다. 주님과의 그런 만남이 있었고, 가르침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름 생각도 많았을 것이고 고민도 많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짧은 만남을 소중히 여겼고, 그리고 그 만남을 곱씹고 또 곱씹었던 그들은 스스로에게 물었을 것입니다. 나는 여태 무엇을 찾고 있었을까? 그리고 나는 지금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들은 내가 찾던 것, 내가 찾던 분이 바로 이분이시다, 이분이 주님이시다, 그리곤 주님을 따라갔던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가을 우체국 앞에서 그대를 기다리는 사람들 중에 이런 사람도 있습니다. 우체통 앞에서 머뭇거리고 서성이는 내 모습이 남들에게 초라해 보일까 싶어 멀찌감치 떨어져 있거나, 아니면 건너편 카페에 들어간 커피잔 앞에 놓고, 건너편 우체국 앞 혹은 우체통 앞을 서성이는 사람들을 쳐다보며 나는 그런 사람과는 다르다 하는 사람입니다.
빌립이 만난 나다나엘입니다.
“43 다음 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떠나려고 하셨다. 그 때에 빌립을 만나서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44 빌립은 벳새다 출신으로,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고향 사람이었다. 45 빌립이 나다나엘을 만나서 말하였다. "모세가 율법책에 기록하였고, 또 예언자들이 기록한 그분을 우리가 만났습니다. 그분은 나사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입니다." 46 나다나엘이 그에게 말하였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 빌립이 그에게 말하였다. "와서 보시오." (요한복음서 1:43-46)
시니컬합니다. 냉소적이고 부정적이며 비판적입니다. 무엇을 하지는 않고, 대신 평가하기를 좋아합니다. 나는 다 안다, 나는 그런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다, 나에게 굳이 설명 하지 않아도 나는 다 안다, 너의 속내 나는 다 안다, 당신의 의도를 나는 다 꿰뚫고 있다, 나는 당신들과 다르다, 똑똑하다, 잘 났다 하는 사람입니다. 사실 아는 것도 많습니다. 그 사람이 악하거나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항상 한 발 뺄 준비가 되어 있고, 사람과도 일과도 한 두 뼘 정도의 거리를 둡니다. 흔히 주변에서 쿨하다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런 사람이 오히려 겁이 많고 약한 사람이기 쉽습니다. 쿨함과 냉소를 가장한 자기 보호와 자기 방어, 그러나 이 사람 역시 무엇을 하지 않는 머뭇거리고 서성이는 사람입니다. 이 나다나엘 역시 편지를 우체통에 넣는 것이 두렵고, 가을 우체국 앞에서 서성거리는 모습이 들킬까 두렵고, 그래서 더 멀찌감치 떨어져 서성거릴 뿐입니다. 하지만 누구보다 더 그대를 그리워하고 또한 몹시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다, 무화과 나무 그늘 아래에 있다는 것, 그 의미는 이것입니다.
“4 사람마다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서, 평화롭게 살 것이다. 사람마다 아무런 위협을 받지 않으면서 살 것이다. 이것은 만군의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이다.” (미가서 4:4)
“10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그 날이 오면, 너희는 서로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이웃을 초대할 것이다.'" (스가랴서 3:10)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평화를 의미하고 그래서 우리가 돌아가야 할 집, home, 고향, 그 본향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무화과 나무의 그늘 아래에 있다는 것, 그것은 히브리 문학에서는 바로 토라, 즉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공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여기 나다나엘이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주님께서 보셨다는 말은 그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평화, 그 고향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고, 그 평화를 가져올 구원자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고, 또한 그 소망 속에 말씀을 읽고, 공부하고, 묵상하고, 또한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즉, 주님은 나다나엘이 바라고 원하고 기도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걸 이미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다나엘은 그만 이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요 1:49)
“1 주님, 주님께서 나를 샅샅이 살펴보셨으니, 나를 환히 알고 계십니다. 2 내가 앉아 있거나 서 있거나 주님께서는 다 아십니다. 멀리서도 내 생각을 다 알고 계십니다. 3 내가 길을 가거나 누워 있거나, 주님께서는 다 살피고 계시니, 내 모든 행실을 다 알고 계십니다. 4 내가 혀를 놀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주님께서는 내가 하려는 말을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 . 6 이 깨달음이 내게는 너무 놀랍고 너무 높아서, 내가 감히 측량할 수조차 없습니다.” 시편 139:1-4, 6)
그 깨달음이 그런 고백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친구 빌립이 주님께서 다른 제자들에게 하신 그 말씀, ‘와서 보라’, 하신 그 말씀을 그대로 나다나엘에게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와서 보라’ 그 말은 그만 냉소적으로 있지만 말고, 그만 남들 평가하고 비평하고 비판만 하지 말고, 네가 무대 위로 직접 올라가라, 그만 서성거리고 그만 구경하고 네가 와서 봐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잘 압니다. 그들 모두는 이제 겨우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 첫 발을 떼었을 뿐이라는 것.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소’ 했던 안드레도, ‘모세가 율법책에 기록한 그분, 예언자들이 기록한 그분, 그 메시아를 우리가 만났소’ 했던 빌립도, ‘선생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했던 나다나엘도, 그리고 주님께서 앞으로 게바라고 부르겠다 했던 베드로도 모두 자기들이 자기들의 입으로 메시아라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던 그 예수님을 결국 배신하고 떠난다는 것. 나중에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 주님을 보게 된 후에 비로소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알게 되리라는 것. 우리는 압니다. 그렇다면 왜 그 제자들은 그런 놀라운 고백을 하고도 그 고백을 끝까지 지키지 못했을까요? 제자가 된다는 것, 제자가 되어 따른다는 것, 제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래서 우리는 요한복음서 1:38-39에 주목해야 합니다.
“38 예수께서 돌아서서,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물으셨다. "너희는 무엇을 찾고 있느냐?" 그들은 "랍비님,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랍비'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다. 39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와서 보아라." 그들이 따라가서, 예수께서 묵고 계시는 곳을 보고, 그 날을 그와 함께 지냈다. . .”
“38 When Jesus turned and saw them following, he said to them, “What are you looking for?” They said to him, “Rabbi” (which translated means Teacher), “where are you staying?” 39 He said to them, “Come and see.” They came and saw where he was staying, and they remained with him that day. . .” (NRSV)
그와 함께 ‘지냈다’로 번역이 된 이 단어는, 그 원래 성경이 쓰여진 그리스어, 헬라어로는 ‘μένω’ (meno)라는 단어이고, 그래서 영어 성경에서는 ‘stay’ 혹은 ‘remain’라는 단어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그 단어의 뜻은 바로 ‘머무르다’ 혹은 ‘거하다’ 입니다. 요한복음서에서 가장 중요하게 사용된 단어이며, 또한 요한 사도가 자주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8 빌립이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좋겠습니다." 9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 그런데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네가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자기의 일을 하신다.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그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요한복음서 14:8-11)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10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다.” (요한복음서 15:9-10)
머무르다, 거하다, 하나님 아버지 안에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다. 그건 잠시 들렀다 가는 것이 아니고, 잠깐 머무르다 가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 그 안에 있는 것, 거기 계속해서 머무르는 것, 거하는 것을 말합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 제자로 산다는 것, 주님의 제자가 되어 주님의 제자로 산다는 것은 스승이신 주님과 제자인 내가 함께 있는 것이고, 스승이신 주님 안에 제자인 내가 있는 것이고, 그래서 내가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고,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것이고,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나는 주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나의 스승이신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면 나도 따라 그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 안에 내가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신 주님은 싫어 주님 밖에 있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주님이 미워 멀찌감치 주님 밖에 있고, 주님이 계신 그 무덤 속이 무섭고 두려워 무덤 밖, 주님 밖에 있고. 그러고 있다가 주님이 부활하시니 그 주님이 좋아 다시 그 주님 안으로 들어가는 것. 그렇게 잠깐 들어갔다 또 잠깐 나갔다, 그리고 다시 들어갔다, 다시 나갔다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죽으나 사나 주님 안에 내가 있는 것, 그것이 바로 내 안에 있으라, 내 안에 머물라는 것의 의미입니다. 내가 구하는 것, 내가 찾는 것이 보이지 않으면 나갔다가, 다시 그게 보이는 듯 싶고 얻을 수 있는 듯 싶어 다시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자라고 하면서, ‘주님,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시어 거기 왕이 되시면 나를 주님의 오른쪽에 아니면 왼쪽에 서게 해주십시오’ 할 땐 그 주님 안에 서로 내가 먼저 있겠다 다투더니, 주님의 십자가 그 오른쪽에 왼쪽에 내가 서야 할 듯 싶으니 누구보다 빨리 그 주님 밖으로 앞다투어 나갔던 그들이 아니었나요?
그런 형편없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부활을 통해 보여주십니다. 그게 아니다, 십자가, 그리고 십자가의 길, 그게 너희가 사는 길이다. 죽어야 사는 길, 그게 영원한 생명의 길이고, 그게 너희가 정말 찾아야 할 것이고, 그게 너희가 내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니 나에게 와서 보아라, 와서 내 안에 머물러라, 그래야 너희는 . . .
“51 예수께서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서 1:51)
그런데 그게 무슨 말씀일까요?
“10 야곱이 브엘세바를 떠나서, 하란으로 가다가, 11 어떤 곳에 이르렀을 때에, 해가 저물었으므로, 거기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그는 돌 하나를 주워서 베개로 삼고, 거기에 누워서 자다가, 12 꿈을 꾸었다. 그가 보니, 땅에 층계가 있고,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아 있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 층계를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다. 13 주님께서 그 층계 위에 서서 말씀하셨다. "나는 주, 너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을 보살펴 준 하나님이요, 너의 아버지 이삭을 보살펴 준 하나님이다. 네가 지금 누워 있는 이 땅을, 내가 너와 너의 자손에게 주겠다. 14 너의 자손이 땅의 티끌처럼 많아질 것이며, 동서 남북 사방으로 퍼질 것이다. 이 땅 위의 모든 백성이 너와 너의 자손 덕에 복을 받게 될 것이다.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며, 내가 너를 다시 이 땅으로 데려 오겠다.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내가 너를 떠나지 않겠다." 16 야곱은 잠에서 깨어서, 혼자 생각하였다. '주님께서 분명히 이 곳에 계시는데도, 내가 미처 그것을 몰랐구나.' 17 그는 두려워하면서 중얼거렸다.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 곳은 다름아닌 하나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로 들어가는 문이다." 18 야곱은 다음날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베개 삼아 벤 그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19 그 곳 이름을 베델이라고 하였다. 그 성의 본래 이름은 루스였다.” (창세기 28:10-19)
“그날 그때 야곱에게 한 약속, 야곱이 보았던 그 비전, 야곱이 보았던 그 열린 하늘, 그 하나님의 집, 그 하늘로 들어가는 그 문. 너희가 찾는 그것, 너희가 찾아야 할 그것, 너희가 여태 찾지 못하고 있던 그것, 여태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찾았던 그것, 온갖 헛 것을 찾아 여태 헤매던 너희가 정말 찾아야 할 그것, 그 열린 하늘, 열린 문, 하나님의 집은 바로 나,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 내가 바로 너희의 주다”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가을 우체국 앞, 우리가 기다리는 그 사람은 그리스도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 주님은 지금 내가 그 편지를 거기 우체국 그 문을 열고 들어가 부치는지, 그 우체통에 그 가을 편지를 집어넣는지, 다 보고 계십니다. 그 주님께서 가을 바람과 가을비로 떨어진 은행잎으로, 낙엽으로, 떨어진 도토리로 말씀하십니다.
“그만 와서 보아라, 그만 와서 넣어라 그 편지. 그 너의 마음 나에게 보내라. 여기 내가 있는 곳에 와서 나와 함께 있어라. 와서 내 안에 있어라, 내 안에 머물러라. 너는 온갖 아프고 슬픈 사연으로 무거워져 노랗게 물든 은행잎으로, 비와 바람에 떨어진 은행잎으로 그렇게 바람에 쓸려 멀어져갈 존재가 아니다. 정말 네가 찾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그러나 너무 오래 서성이고 머뭇거리지는 말고, 그만 여기 와서 보아라. 그리고 나와 함께 있어라, 내가 있는 곳에 나와 함께 머물러 있어라.”
제자가 되는 것, 제자가 되어 따르는 것, 제자로 사는 것. 그것은 짧은 스침, 짧은 만남으로 시작하지만, 겨우 하루도 안되는 시간으로도 믿음이 생길 수 있지만, 그래서 고백이라는 것도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제자로 사는 것, 그것은 평생에 걸치는 만남이며, 평생 이루어지는 동거이며, 평생을 함께 하는 동행입니다. 그래야 영원한 만남, 영원 속으로 들어가는 만남이 될 수 있습니다. 와서 보라는 것은 와서 보고 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와서 보고 듣고 알고 깨닫고 믿고, 그리고 영원히 주님이 계신 곳에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고, 주님과 함께 사는 것이고, 주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와서 보아라 하시는 것은 그 영원한 만남 속으로 나를 초대하신다는 것입니다.
“23 하나님, 나를 샅샅이 살펴보시고, 내 마음을 알아주십시오. 나를 철저히 시험해 보시고, 내가 걱정하는 바를 알아주십시오. 24 내가 나쁜 길을 가지나 않는지 나를 살펴보시고, 영원한 길로 나를 인도하여 주십시오.” (시편 139:23-24)
주님께서 우리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무엇을 찾고 있느냐?”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주님께 물어야 합니다.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그리고 주님의 대답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꼭 들어야 합니다.
“와서 보아라.”
그리고 우리는 거기로 가서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갔다가 휙 한 번 둘러보고 그냥 나오지 말고, 거기 주님과 함께 지내야 합니다. 아예 내 집이다 하며 거기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린 욕심도 많고 생각도 많고 뜻도 많습니다. 우린 약하고 또 악하기도 합니다. 우린 끈기도 없고 참을성도 없습니다. 그래서 금방 싫증이 나서 주님이 묵고 계신 곳을 나옵니다. 그러면 주님이 또 물으실 겁니다.
“너는 또 무엇을 찾고 있느냐?”
그러면 다시 정신을 차리고 주님께서 처음처럼 물어야 합니다.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그러면 주님께는 마치 처음이신 듯 또 말씀하실 것입니다.
“와서 보아라.”
그러면 우리는 꼭 그 주님께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이게 매년 우리를 찾는 가을이 주는 교훈, 가을 노란 은행잎과 가을 낙엽이 주는 교훈, 툭 하고 땅에 떨어진 한 알의 도토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여기 가을 고백을 담은 ‘가을 편지’ 가 있습니다.
가을 편지
하늘 향한 그리움에
눈이 맑아지고
사람 향한 그리움에
마음이 깊어지는 계절
순하고도 단호한
바람의 말에 귀 기울이며
삶을 사랑하고
사람을 용서하며
산길을 걷다 보면
툭, 하고 떨어지는
조그만 도토리 하나
내 안에 조심스레 익어가는
참회의 기도를 닮았네
– 이해인
내가 무엇을 찾고 있었는지, 그러나 이제 내가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 그리고 그 무엇이 무엇이고 누구인지 알려주는, 온갖 사연으로 노랗게 물든 은행잎과 잘 익은 한 알 도토리가 주는 가르침입니다. 참회가 필요한 가을, 우리의 참회의 기도가 주님께 부치는 가을 편지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가을 우체국입니다. 부치지 못한 편지로 있지 마시고, 주님께 부친 편지로 주님께서 읽으신 편지로, 그래서 주님께 답장을 받는 삶, 이미 받은 삶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