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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난 주일 여러분과 함께 나눈 말씀의 주제는 그리스도 예수의 침묵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나눌 말씀의 주제는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법정 안 빌라도를 비롯한 정치 종교 권력과 법정 바깥에 모여 있는 무지하고 어리석은 군중들, 그 광야 한 가운데 침묵을 지키셨던, 그리고 이제 여기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아들. 골고다로 뻗은 길, 그리고 그 언덕 꼭대기, 거기보다 더 높이 솟은 십자가 그 위, 그리고 그 언덕 아래 어느 무덤. 그리고 그 길 가에 서 있는, 혹은 그 길을 따라가며 멸시와 증오로 욕지거리와 돌팔매질의 해대는, 살아는 있으나 마치 죽어 있는 듯 보이는 사람들로 둘러싸인 거기, 광야에서 홀로 있어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고 광야에 묻힌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오랜 침묵을 깨셨다기 보다는, 침묵 속에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셨다는 것이 더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 하나님 역시 아무런 말씀이 없으십니다. 아들의 침묵이 아버지의 침묵으로 이어집니다.   

 

  1.  

복음서 속 등장 인물들 중에 궁금증과 호기심을 일으키는 두 인물이 있습니다.

“32 그들은 나가다가,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을 만나서, 강제로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하였다.” (마태복음서 27:32)

“26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가다가, 들에서 오는 시몬이라는 한 구레네 사람을 붙들어서, 그에게 십자가를 지우고, 예수의 뒤를 따라가게 하였다.” (누가복음서 23:26)

마가복음서는 조금 더 자세히 언급합니다.    

“21 그런데 어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길에, 그 곳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로서, 구레네 사람 시몬이었다. 그들은 그에게 강제로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하였다.” (마가복음서 15:21)

 

바로 구레네 사람 시몬입니다.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와 함께 저에게 가장 많은 궁금증과 호기심을 갖게 만든 성경 속 인물입니다. 그 이유는 이것입니다. 왜 복음서 저자들은 하나같이 구레네 사람 시몬의 이름을 언급했을까, 게다가 마가복음서의 저자 마가는 왜 그 시몬이 ‘알렉산더와 루포’라는 두 아들의 아버지이고, 그는 지금 어디 먼 곳에 갔다고 이제 막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길이었고, 또한 그는 구레네 출신이며, 그 시몬이 지금 강제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일일이 다 말하고 있을까, 굳이 마가는 시몬의 두 아들의 이름까지 말할 필요가 있었을까, 기독교에 대한 박해, 교회와 신앙인에 대한 박해가 심했던 당시, 굳이 이렇게까지 한 사람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줄 이유가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사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제자들, 형제들,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여인들을 제외하고는 그 이름을 명확하게 밝히는 경우가 매우 드뭅니다. 눈 먼 거지였던 바디매오, 나무 위에 올라 주님을 보았던 세관장 삭개오 정도가 겨우 기억에 남습니다. 그 외 많은 인물들은 거의가 익명입니다. ‘걷지 못하는 한 남자,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한 사람, 우물가에 한 사마리아 여인, 아이가 아픈 한 아빠 엄마, 몸져누운 하인과 부하를 둔 한 백부장, 귀신이 들려 무덤가에 살던 한 남자 . . . 등등’ 성경 이야기 속에서 그 이름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경우는 무척 드뭅니다. 그런데, 왜 이 장면에서는 잠깐 등장하는 이 사람에 대해 이토록 자세한 정보를 주었을까요?

 

그 이유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갔던 그 시몬을 비롯한 그의 가족 모두 그때 1세기 그리스도의 신앙 공동체에 아주 잘 알려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는 것이 성경 학자들의 대체적인 의견입니다. 이런 상상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너도 알지, 구레네의 시몬이라는 사람.”

“알지 그럼. 그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 말하는 거 아냐 지금.”

“그래 그 사람. 그 사람이 우리 모임에 온데, 설교하러.”

“어 그래~. 그럼 이번엔 꼭 가야겠네.”

아마도 그 시몬의 자녀인 알렉산더와 루포 역시 신앙 공동체에 잘 알려진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저희는 알렉산더, 그리고 루포라고 합니다.”

“그럼 혹시 구레네의 시몬의 아들?”

“네.”

 

그렇다면 무엇이 시몬뿐만 아니라  그를 비롯한 두 아들까지 당시 초대 교회의 신앙 공동체에게,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잘 알려지게 되었을까요? 단지 예수님이 십자가를 대신 지고, 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갔기 때문이었을까요? 그래서 그저 예수님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함께 했었다는 그 이유, 그래서 그 평범하지 않은 경험을 나눠달라 해서 이곳 저곳을 다녔던, 그래서 유명해졌을까요? 그게 아니면 도대체 왜 시몬과 그 가족은 당시 초대 교회와 교인들에게 유명하게 되었을까? 단지 그게 아니라, 혹시 시몬과 그의 가족이 박해 속에 있는 초대 교회와 신앙 공동체에게 어떤 용기를 주고 힘을 주고 믿음을 잃지 않게 하는, 그래서 복음의 증인으로 살았던 것이 아닐까요?

로마 군인의 강요와 겁박과 폭력에 내몰려 어쩔 수 없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예수님과 함께 골고다 언덕을 오르던 그 길고도 짧은 시간 동안 혹시 시몬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경험, 어떤 체험이라도 했을까요? 그래서 여기 이렇게 복음서의 가장 중요한 가장 중요한 사건의 등장 인물로, 그것도 자신의 이름 뿐이 아니라 자녀들의 이름까지 알려지게 되었을까요?

 

  1.  

세 복음서 모두가 전하기를, 로마 군인들이 길을 가던 시몬이 붙잡아, 강제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연히 길을 가다 요란하고 소란스러운 광경이 보이고, 사람들이 그리로 몰리고, 그래서 이게 뭔가 싶어 기웃거리다 우연히 거기 로마 군인의 눈에 띄어, 붙들려 서슬이 시퍼런 식민지 주둔군의 군인의 강압과 폭력에, 피식민지의 원주민으로 어쩔 수 없어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겁에 잔뜩 질린 채, 무서움과 두려움 속에서 그 길을 걸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몬은 의문이 들었지 않았을까요?  

“내가 왜 이래야 하는 거지, 내가 왜 이 사람과 같이 이 치욕과 수모와 멸시와 증오와 혐오를 받으면 이 길을 걸어야 하는 거지? 난 그냥 지나가는 길이었는데. 그저 무슨 일인가 싶어 잠깐 서서 구경이나 할까 했을 뿐인데. 난 저 사람을 잘 알지도 못하는데.”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 시몬은 아마 그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다 옆을 쳐다보았을 것입니다. 지금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는 나를 차마 볼 수 없는 한 남자. 내 옆에서 고개를 들 힘도 없이 겨우 겨우 한 발 한 발 힘겹게 떼며 언덕길을 오르고 있는 한 남자. 자기 대신 십자가를 진 나를 말 없이 따라오고 있는 한 남자. 내 앞에서 높지도 않은 언덕을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걷고, 걷다가 쓰러지는 한 남자. 그 예수를 보자 분노가 치솟습니다. “너 때문에 내가 이 고생 아니냐? 당신 탓이다, 당신 때문이다, 책임져라.” 그러나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습니다. 무거운 침묵입니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도 보이질 않으니 그 남자에게 욕을 하는 것도, 분노의 말을 쏟아내는 것도 지쳐갑니다. 그러다 머리엔 가시관을 쓰고, 고문으로 찢긴 상처에서 피는 흐르고, 옷은 너덜너덜한 거지꼴의 그 남자가 조금은 측은합니다. 도대체 무슨 큰 잘못을, 무슨 죽을 죄를 지었길래 이 사람은 이 참혹한 지금 걸어갈까, 궁금합니다.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당신은?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들 하는데, 당신의 그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 겁니까? 그러면 나는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 당신의 그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는 겁니까? 나의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에 계신 겁니까?”   

 

  1.  

평소처럼 집을 나섰습니다. 그제처럼 어제처럼 오늘도 같은 문을 당연한듯 열고 들어서는데, ‘쿵’, 어제까지 없던 큰 벽에 부딪힙니다. 생각에 잠겨 걷는데, ‘빡’, 어제까지 보지 못했던 돌부리에 채입니다. 순간, 모든 것이 낯설어집니다. 이건 뭐지? 이게 아닌데, 분명 아닌데. 이럴 리가 없는데. 익숙한 아침, 익숙하게 일어나, 익숙하게 잠자리를 정리하고 세수하고 밥을 먹고, 익숙하게 집을 나서고, 익숙한 길을 걷고, 익숙한 문을 열고, 그렇게 익숙한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모든 것이 낯설어집니다. 낯선 사람, 낯선 일, 낯선 상황입니다. 예상하지 못했으니 예상하지 않았으니 낯섭니다. 나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이 없고, 나의 계획에 있지 않고, 나의 어떤 예상과 확률에는 없고, 그러니 사고입니다. 그런데, 그냥 단순 사고가 아닙니다. 사건입니다. 누가 나를 그 속에 내던졌다는 표현이 맞습니다. 그래서 사건입니다. 사건은 아주 작은 계기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어느 순간 내 남편의 얼굴, 내 아내의 뒷모습, 내 아이의 잠자는 얼굴이 낯설고, 내 책상이 내 옷이 그리고 내 얼굴이 낯설고. 십자가가 낯설고 교회가 낯설고 말씀이 낯설고, 나의 신앙이 낯설고. 그래서 내 삶이 내 생이 낯설어질 때가 갑자기 찾아옵니다. 그래서 사건입니다.    

“뭐지 이건? 나에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내가 뭘 잘못했나? 이 길이 아닌가? 이 문이 아닌가? 여기가 아닌가?”

멍한 순간이 있습니다. 그럴 때가 있습니다. 그냥 가고 있었고, 문을 열었는데.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과 크게 다르지 않을 내일이 있을 것이다 했는데 갑자기 그 모든 것이 낯설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일상에서, 삶에서, 그리고 신앙에서 이런 경험과 기억 없으십니까? 하지만 우리는 기분 탓 혹은 날씨 탓 혹은 나이 탓, 이런 탓 저런 탓으로 대수롭지 않은 듯 넘어갑니다. 별 일 아니라는 듯. 그런데, 그게 사고로 다가오는 순간 우리는 다르게 반응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단순 사고가 아닌 사건이라는 것을 조금씩 깨닫습니다. 그리고는 이유를 찾습니다.  

“왜 나에게, 왜 내 가족에게 . . . 왜 하필 지금. 왜 하필 나한테, 내 가족한테. 남들처럼 그냥 살고 싶을 뿐인데. 단지 내 가족 건강하게 아무 탈 없이, 편안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 그게 다인데. 그게 전부인데. 난 큰 욕심, 별 욕심 없는데. 그런데 왜 나에게, 우리에게 이런 일이 . . .”

지금 구레네의 시몬 역시 그 이유를 찾고 있을 것입니다.

“왜 하필 나인가? 왜 하필 지금 이 상황에 내가 있는가? 왜 하필 이 예수라는 사람과 함께 여기 있는가? 왜 하필 내가 그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야 하는가? 왜 하필 내가 . . .”  

그 이유 없음이 우리를 더욱 힘들게 합니다. 영어 단어로 하면 ‘random’, 우리말로 하면 ‘닥치는 대로’, ‘마구잡이로’, 혹은 한자어로 하면 ‘무작위’로 오는 듯 보이는 사고, 사건. 내가 겪는 고난과 고통에 그 이유를 찾지 못하는 것, 찾을 수 없다는 것, 내가 알 수 없다는 것, 그것이 우리의 삶을 흔듭니다.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것은 거기서 도무지 빠져나갈 구멍이 내게 보이질 않는다는 것입니다. 구레네 시몬이 그렇습니다.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싫다고 나는 할 수 없다고 하지 않겠다고 거부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로마 군인들과 싸울 수도 없고, 그렇다고 거기서 도망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냥 운명을 탓할까요? 팔자려니 할까요?

 

그런데, 그렇게 이유를 찾고, 내 신세를 한탄하고, 그래서 지금 여기 내가 처한 상황과 처지에 눈 빠트리고 코 빠트리느라 우리는 내 옆을 보지 못합니다. 내 옆에 누가 있는지, 내 옆에 누가 나와 함께 걷고 있는지, 나와 같은 상황과 처지, 아니 내가 있는 그 상황과 처지에 나와 함께 있어 나와 지금 그 길을 함께 걷고 있는 한 사람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내가 그 사람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내 십자가를 나 대신 지고 가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내 안에 내가 너무 많고 내 밖에도 내가 너무 많아, 그 모든 나를 지금 이고 지고 끌고 가고 있는 그 한 사람을 그만 보지 못합니다. 지금 구레네 시몬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렇습니다.

 

  1.  

이유를 찾고 또 찾고, 그 이유를 묻고 또 묻고, 그러다 지치고, 그러다 점점 화가 나고, 그러다 점점 내가 속았다, 내가 배신당했다, 원망이 찾아오고, 그렇게 신앙은 점점 식어가고. 도무지 하나님은 내 얘기를 들으시는 것인지 듣지 않으시는 것인지 모르겠고. 주님은 나 같은 사람은 신경도 쓰시지 않는 건 아닌지, 하나님이 계신 것인지 안 계시신 것인지도 모르겠고. 급기야, 이래 사나 저래 사나,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그게 그거 아닐까 싶은 마음이 들기 시작을 하고. 그렇게 우리는 신앙에서 멀어져가는 것은 아닐까요? 그 분이 나에게서 멀어지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분으로부터 멀어져가는 것은 아닐까요?   

 

그때 우리가 정말 가져야 할 근본적인 질문, 나에게 묻고 또 물어야 할 질문이 이것이 아닐까요?     

“그래, 나는 그렇다 해도. 그럼 여기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는 왜일까? 무슨 잘못이 있어, 무슨 죄가 있어 그런 고난과 고통 속에 계셨을까?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수많은 기적들을 보이셨는데, 과연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었을까? 그런 것까지 겪으실 이유가 있었을까? 그리고 당신의 아들의 그런 고난과 고통, 그 참혹하고 처참한 죽음 앞에서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왜 아무런 말이 없으셨을까, 왜 그렇게 무기력하기 짝이 없으셨을까?” 

 

"4 그 때에 빌라도가 다시 바깥으로 나와서, 유대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보시오, 내가 그 사람을 당신들 앞에 데려 오겠소.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소. 나는 당신들이 그것을 알아주기를 바라오." 5 예수가 가시관을 쓰시고, 자색 옷을 입으신 채로 나오시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보시오, 이 사람이오" 하고 말하였다. 6 대제사장들과 경비병들이 예수를 보고 외쳤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그러자 빌라도는 그들에게 "당신들이 이 사람을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소" 하고 말하였다." (요한복음서 19:4-6)

 

“보시오, 이 사람이오.”

여러분은 찾으셨습니까, 이 사람의 잘못을? 이 사람이 죽어야 할 죄를?

그렇다면 구레네 사람 시몬은 어떻습니까? 길을 가다가 우연히 거기 서 있었던, 그래서 로마 군인의 눈에 띄어 억지로 불려나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된 그 시몬의 잘못과 죄는 찾으셨습니까?

 

  1.  

마태복음서 5장의 ‘산상설교(山上說敎)’, 즉 산 위에서 당신의 입으로 전하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첫 설교를 시작하셨던 주님은, 이제 지금 여기 마태복음서 27장의 ‘가상설교(架上說敎) ’, 즉 골고다 언덕 위, 십자가 그 위에서 당신의 몸으로 마지막 설교를 전하십니다. 그러나 그 설교 내용은 다른 듯 같습니다. 산상설교, 그 복이 있다 사람, 바로 지금 여기 우리를 위해 당신의 십자가를 지고가시는 주님이 그 복이 있는 사람이고, 바로 지금 여기 억지로 십자가를 대신 지고가는 구레네 시몬이 그 복이 있는 사람이고, 그리고 이 땅에서 이런저런 고통과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굳건히 지키고 그 믿음을 성실히 실천하며 그 믿음을 온 몸으로 살아낸 그리고 살아내고 있는 모든 믿는 이들 모두가 바로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모두 몸과 마음이 가난합니다. 그들은 그 까닭을 알 때도 있지만 모를 때가 더 많은 그 삶의 이유들 속에 슬퍼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참으로 온유합니다. 겸손합니다. 떠밀려서 혹은 자진해서 낮은 곳으로 내려갔고 낮은 곳에 있습니다. 그들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의를 찾고 그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이 마릅니다. 그리고 잘은 몰라도 그 하나님의 의를 실천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비가 정말 필요한 사람들이면서도 또한 하나님의 자비를 실천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마음이 깨끗합니다. 그리고 평화를 이루려고 합니다. 평화의 사람이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의 때문에 박해를 받습니다. 당연하다는 듯 모욕도 당하고, 온갖 비난도 받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입니다. 아니 이미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받을 상이 너무 크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미 그 상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받은 듯 그렇게 삽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의 아버지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께서 지금 나와 함께 이 길을 걷고 계신 것을 마음의 눈으로 그분을 보았고, 영의 귀로 그분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들은 골고다 언덕을 넘고 무덤을 지나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1.  

여기 그냥 무력하게 침묵하고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님이 아니십니다. 지금 주님은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길을 내고 계시고, 아버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되고 계시는 중입니다. 우리가 살 길, 우리가 영원한 삶을 살 길, 우리가 아버지께로 우리 아버지의 집으로 우리 집으로 돌아가는 그 길을 지금 내고 닦고 계시고 그 길을 되고 계시는 중입니다. 나와 우리의 생명이 헐 값에 살 수 있는 그런 생명이 아니고, 나와 우리가 들어가야 할 그 나라가 싼 값에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할 수 없어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래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가고 계십니다. 그래야 하기 때문에 아들 하나님은 그 길을 가고 계십니다. 그냥 할 말이 없어 침묵 속에 계시고 해 줄 것이 없어 가만히 아들의 고통을 지켜보고 계신 아버지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래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계십니다. 그래야 하나님 나라가 우리 모두에게 열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아들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 주님이 지금 우리 옆에서 우리와 함께 걷고 계십니다. 나는 내가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주님께서 내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십니다. 나는 단지 옆에서 그걸 거들고 있었을 뿐, 그 끝을 살짝 잡고 따라갈 뿐. 그런 나도 이렇게 아픈데, 우리가 이렇게 힘이 드는데. 그런데 주님은 그 가시관을 쓰고서도 나에게 위로를 건네십니다. 당신 머리에 그 가시관을 쓰고서도, 우리게 위로의 미소를 건네십니다. 십자가를 수천, 수만 번 지고 또 지고, 수천, 수만 번 그 십자가에 못박히셨는데. 지금도 내가 원하면 우리가 바라면 언제든 그 십자가를 지고 또 지고, 못이 박히고 또 박혀도 마다하지 않으십니다. 그 분, 그 주님을 구레네 시몬은 바로 옆에서 보았습니다. ‘왜 하필 나입니까, 왜 하필 내 가족입니까, 왜 하필 지금입니까’ 나의 질문에 도통 대답이 없으신 주님께 다시 묻고 또 물으며 원망 가득한 얼굴로 다가갑니다. 너무 아프고 너무 힘들고 원망이 분노가 됩니다. 대들겠다 따지겠다 바짝 다가갑니다. 그러나 여전히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나를 보시는데. 분명 아픔으로 찡그리시는데, 어느 순간 그게 나에게 보내는 위로의 미소로 보입니다. 그리고 들릴 듯 말 듯, . . .

“그래 안다, 내 다 안다, 너 아픈 거 다 안다. 나도 아프다, 네가 아프니. 너로 하여 나도 아프고, 너와 같이 나도 아프다. 그래 다 안다, 내 다 안다.”   

 

"4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5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 (이사야서 53:4-5)

 

깨달음입니다. 주님이 왜 아프신지, 왜 거기 십자가를 지고 가셔야 했는지, 왜 거기 십자가에 못박히셨는지, 왜 무덤에 묻히셨는지, 구레네 시몬도 알고 우리도 알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나 때문이라는 것, 내 두 아들 때문이라는 것, 내 가족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때문이라는 것. 그 사실을 시몬은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나 때문에, 우리 때문에 아프시다는 걸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깨달음이 그때 그날 거기 그 현장, 그 사건을 통해 시몬의 마음에, 시몬의 삶에 들어왔을 것입니다. 그저 우연히, 혹은 재수없게 문을 열다 벽에 부딪힌 것도 아니고, 길을 걷다 돌부리에 채인 것도 아니라는 것. 가던 길 그만 돌아서라는, 침묵 속에 나를 향해 말을 건네신 주님의 사랑이었고 구원의 손짓이었다는 것. 그 모든 것이 다 영원한 생명, 하나님의 나라로의 초대였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 깨달음은 믿음을 낳았고, 그 믿음이 그를 변화시켰고, 그리고 그 신앙의 길을 시몬과 그 가족은 갔던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께서 가셨던 그 길을 이제 억지로가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감사의 마음으로 걸었던 것입니다.

 

  1.  

이 중요한 사건을 기록한 복음서에 특히 마가복음서에 구레네 시몬이  자식들의 이름까지 언급되며 갑자기 등장하는 이유였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 구레네 사람 시몬과 그의 가족의 삶이 그날 이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변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세기 세상의 모진 박해중에도 신앙을 지켰던 초대 교회와 신자들은 그 구레네 사람 시몬과 그의 가족을 통해 그 십자가의 신비, 그 복음의 신비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와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13 주님 안에서 택하심을 받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여 주십시오.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이기도 합니다.” (로마서 16:13)

 

성경 학자들은 여기 루포가 바로 마가복음서에서 마가가 말한 그 구레네 시몬의 아들 중 한 명 루포를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바울은 루포는 주님께서 택하신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시몬의 아들 루포는 당시 로마에 있는 많은 교회들과 신자들 사이에 잘 알려진 사람이었고, 아마도 복음 전도자, 설교자, 혹은 복음 교사로서 신앙의 모범인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의 어머니, 즉 구레네 시몬의 아내는 바울에게 어머니와 같은 존재입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은 우연히 그날 그때 그 시간에 내가 거기를 지나가고 있었던 것이 아니고, 우연히 로마 군인의 눈에 띈 것도 아니었습니다. 우연히 혹은 억지로 내가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진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과 뜻하심 속에 내가 거기 있어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졌고, 그것이 그냥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 내 일생일대의 큰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그 사건이 시몬을 변화시켰고, 그의 두 아들을 변화시켰고, 그 아내를 변화시켰습니다. 나와 내 가족, 내 친척과 내 친구들과 내 이웃을 변화시켰습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우연이 필연이 되었고, 순간이 영원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신비이고 복음의 신비이고, 바로 침묵 속에 일하시는 그리스도 예수,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1.  

기적이란 뭘까요? 기적이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께서 돌멩이를 빵으로 만들기를 거부하신 것이 기적입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께서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지 않으신 것이 기적입니다. 세상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며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께서 세상 그거 다 내 것이다 헛소리하는 그 사탄을 그러나 아직은 때가 아니다 내버려 두신 것이 기적입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 십자가 그 위에서 내려오지 않으신 것 그것이 기적입니다.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를 그 고난과 고통, 그 모욕과 멸시 속에 내버려 두고 다만 지켜만 보고 계신 그 아버지 하나님의 그 침묵이 바로 기적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기적들 위의 기적, 아끼고 아끼다 마침내 내어주신 기적, 하실 수 있는 것을 하지 않으시고 침묵 속에 계시다 마침내 이루신 기적,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님의 부활이고, 그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구원이고, 우리와 아버지 하나님 사이에 이루신 화해입니다. 그 놀라운 기적의 결과물이 여기 여러분과 저입니다.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연히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고, 우연히 세상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는 우연히 이 땅에 우연히 사람으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연히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올라가신 것이 아닙니다. 구레네 시몬이 우연히 거기 있었던 것도, 주님의 십자가를 우연히 지게 된 것도 아닙니다. 시몬과 시몬의 가족을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겠다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 계획에 우연은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침묵, 그 아들 그리스도 예수의 침묵, 그것은 우리를 향한 끝이 없는 사랑이고, 상상할 수 없는 구원이고, 놀라운 은혜입니다. 

 

  1.  

‘이게 뭐지, 왜 하필 나에게, 왜 하필 우리 가족에게, 왜 하필 지금’

때로는 우연을 가장해서, 때로는 억지를 가장해서, 때로는 사고를 가장해서 여러분과 저에게 오는 그때, 그 순간이 우리를 영원으로 이끄는 때이고 순간입니다. 나의 믿음의 키가 자라는 순간입니다. 절벽에서 떨어지는 꿈을 꾸는 그때가 나의 키가 자라는 때입니다. 떨어지기 싫다 손을 놓지 않으면 나의 키는 자라지 않습니다. 절벽에서 손을 떼는 것, 그게 믿음입니다. 그럴 때 나를 가만히 떠받치는 주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골고다 언덕, 십자가의 길. 억지로 그 길을 갈 때가 있습니다. 우연히 그 길을 갈 때도 있습니다. 남들 가니 가볼까 하며 갈 때도 있습니다. 아닙니다 이제 제가 가겠습니다 하고 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길은 결코 우리를 배반하지 않을 것입니다. 

 

흔들리며 가는 게 우리입니다. ‘왜 하필 나인가, 왜 하필 우리인가, 왜 하필 지금인가’ 그러나 그 질문을 놓아서는 안됩니다. 그 질문이 우리를 매 순간 주님께로 이끌 것입니다. 그러나 질문과 함께 믿음을 잡고 있어야 됩니다. 질문이 믿음이 함께 가야 합니다. 질문이 생길 때마다 믿음을 다시 잡아야 합니다. 믿음이 쉬워질 때 그 질문을 다시 잡아야 합니다. 아프고 힘에 겨운 그때가 내 곁에 계신 주님을 보야 하는 때이고, 주님께 더 가까이 가는 때이고, 내가 주님께 자라는 때입니다.  

침묵 속에서 나를 보고 계신 주님, 나와 함께 길을 걷고 계신 주님, 그러나 아무 말 없으신 그 주님께 우리는 묻고 또 침묵해야 합니다. 주님의 침묵 속으로 들어가 나도 침묵 속에 주님의 음성을 듣고, 나에게 가만히 지으시는 주님의 미소를 보며, 주님과 함께 주님께서 이미 가셨던 그 길을 계속 걸어야 합니다. 제대로 그리고 다는 못해도 주님의 십자가를 내가 조금 지고,  서로의 십자가도 조금씩 나눠지고 걸어가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주님께서 그런 우리 모두의 십자가를 지고가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주님께서 지금 우리 곁에 계십니다. 가시관을 쓰시고서도 여전히 나에게 위로를 건네십니다. 상처투성이의 얼굴로도 여전히 나에게 미소를 지으십니다. 그리고 가만히 물으십니다.

“너는 십자가를 질 수 있겠느냐?”

주님께서 물어보실 때,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십자가를 질 수 있나, 주가 물어보실 때.

죽기까지 따르오리, 성도 대답하였다.

우리의 심령 주의 것이니, 주님의 형상 만드소서.

주 인도 따라 살아 갈 동안, 사랑과 충성 늘 바치오리다.

- '십자가를 질 수 있나' 찬송가 461장 1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