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길 위에서의 본격적인 가르침의 시작은 ‘산상 설교’입니다. 주님은 먼 길을 가시기 전에 먼저 그 옛날 모세처럼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거기 따라온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가르치셨습니다. (마태복음서 5-7)
마음이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한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 의를 위해 박해를 받은 사람이 복이 있고, 이런 사람들이 복을 받을 사람들이고, 바로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차지할 것이다 (마태복음서 5:3-11), 그리고 이것이 주님의 첫 가르침이었습니다. 길 위에서 길을 가르치셨던 예수, 그 길을 제자들과 함께 걸으셨던 예수. 지금 여기, 이제 당신의 아버지의 나라, 그 하나님 나라로 향한 길고도 긴 여정을 마무리하기에 앞서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고 주님은 아버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마지막 설교, 그 마지막 가르침을 주십니다. 끝이 아닙니다. 사실 여기부터 예수님께도 제자들에게도 가장 힘든 길이 될 것입니다.
주님의 마지막 설교 중에서 그 처음은 이것이었습니다.
“45 누가 신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 주인이 그에게 자기 집 하인들을 통솔하게 하고, 제 때에 양식을 내주라고 맡겼으면, 그는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46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하고 있는 그 종은 복이 있다. 47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마태복음서 24:45-47)
한 주인이 종을 불러 자기 집 하인들을 잘 돌보라고 맡기고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 종은 주인이 맡긴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것입니다.
“1 그런데,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불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2 그 가운데서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3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불은 가졌으나, 기름은 갖고 있지 않았다. 4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자기들의 등불과 함께 통에 기름도 마련하였다.” (마태복음서 25:1-4)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가 있었는데, 다섯은 등불과 함께 따로 통에 기름을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다섯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것입니다.
“14 또 하늘 나라는 이런 사정과 같다.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자기 종들을 불러서, 자기의 재산을 그들에게 맡겼다. 15 그는 각 사람의 능력을 따라,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주고, 또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주고, 또 다른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다. 16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곧 가서, 그것으로 장사를 하여, 다섯 달란트를 더 벌었다. 17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도 그와 같이 하여, 두 달란트를 더 벌었다.” (마태복음서 25:14-17)
먼 길을 떠나기 전에 주인이 종들을 불렀습니다. 종들에게 각각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그리고 한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다른 두 종은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더 벌어 돌아온 주인을 맞았는데, 한 달란트를 받았던 그 종은 그 한 달란트 달랑 들고 주인을 맞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그 마지막 설교 중에서 마지막입니다. 그런데 이전 것과는 많이 다릅니다. 최후의 심판에 대한 주님의 설교입니다.
“31 인자가 모든 천사와 더불어 영광에 둘러싸여서 올 때에, 그는 자기의 영광의 보좌에 앉을 것이다. 32 그는 모든 민족을 그의 앞에 불러모아,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갈라서, 33 양은 그의 오른쪽에, 염소는 그의 왼쪽에 세울 것이다. 34 그 때에 임금은 자기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사람들아, 와서, 창세 때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35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어 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할 것이다.” (마태복음서 25:31-36)
인자, 영광, 자기의 영광의 보좌, 임금, 내 아버지, 내가. 이전에는 어떤 주인, 어떤 신랑, 어떤 사람을 예로 들어 말씀하셨는데, 이제 더는 숨길 필요도 이유도 없다 하시는 듯, 메시아를 뜻하는 ‘인자’, 즉 ‘사람의 아들’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시고, 하나님께 속한 단어인 ‘영광’, ‘자기의 영광의 보좌’, 그리고 ‘왕’, 그리고 ‘나의 아버지’, 그리고 ‘나’라는 단어를 숨김없이 쓰십니다. ‘자기의’, ‘나의’, ‘나’. 1인칭입니다.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던 예수님은 이젠 그럴 일이 아니다, 그럴 시간이 없다, 하신 듯. 비유로 인해 혹시 나의 의도와는 너희가 다르게 이해할 수 있을까 싶다, 하신 듯. 그러다 그냥 하나의 우화로, 이야기로 알아들을 수 있을지 모르니, 그런 문학적 혹은 상상력을 요하는 표현은 아예 쓰지 않겠다 작정하신 듯, 직접적으로 확실하게 말씀하십니다. 마치, 너희가 더하고 빼고 할 것이 없고, 설명을 하고 말고, 해석을 하고 말고 할 것이 없다, 그냥 들은 대로 이해하고 들은 대로 해라 하시는 듯, 그냥 날것으로 말씀하십니다.
게다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1 인자가 모든 천사와 더불어 영광에 둘러싸여서 올 때에, 그는 자기의 영광의 보좌에 앉을 것이다. 32 그는 모든 민족을 그의 앞에 불러모아,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갈라서, 33 양은 그의 오른쪽에, 염소는 그의 왼쪽에 세울 것이다.” (마태복음서 25:31-32)
“‘모든’ 천사와 더불어 영광에 둘러싸여서 올 때에, . . . ‘모든’ 민족을 불러모아” 자못 심각한 말씀입니다. 한 아기로 한밤중에 아무도 모르게 오셨던 주님께서 이제 ‘모든’ 천사를 대동하고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영광에 둘러싸여서 오신다 합니다. 그런데 바리새파, 사두개파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제자들만이 아닙니다. 유대인들만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방사람들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만이 아닙니다. 세상 ‘모든’ 민족, ‘모든’ 나라, ‘모든’ 사람들을 죄다 불러모으겠다 하십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무슨 일일까요?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 걸까요?
최후의 심판입니다. 그러나 사실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마치 우리는 처음 들었다는 듯, 혹은 남의 일이라는 듯 합니다. 그러나 신앙이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公) 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 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사도신경)
최후의 심판이 있다, 그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고백이며 또한 다시 오실 주님을 향한 사랑 고백입니다. 그냥 사랑의 감정에 대한 고백이 아니라, 내가 만약 고백한 대로 살지 않으면 그 책임을 다하겠다, 죽겠다는, 그 죽기를 각오한 고백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38 음란하고 죄가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인자도 자기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마가복음서 8:38)
“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인자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누가복음서 9:26)
내가 사랑을 고백했던 그 분이 나중에 오셔서, 제대로 사랑을 하지도 사랑을 살지도 않은 나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시고 나를 부끄럽게 여기실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부끄럽게 여기시는 것,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27 인자가 자기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자기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터인데, 그 때에 그는 각 사람에게, 그 행실대로 갚아 줄 것이다.” (마태복음서 16:27)
나의 행실대로 갚아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게 큰일입니다. 내가 고백하고 다짐했던 그 사랑을 내가 살지 않으면, 나는 그 대가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사랑을 고백한 대로 내가 신앙을 고백한 대로 내가 살았다면, 내가 사랑을 정말 했고 내가 신앙을 정말 살았다면 나는 주님께 상을 받을 것이고, 하지만 그렇지 못했다면. 그래서 잊혀진 고백으로, 그저 입으로만 한 다짐으로 살았다면 나는 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큰일이고 심각한 일입니다. 거기에 예외는 없다, 어느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욱 궁금합니다. 도대체 오른쪽에 설 사람들과 왼쪽에 설 사람들을 구별해서 나누는 그 기준은 뭘까요? 양과 염소야 그 생김새가 다르니 구별할 수 있겠다 싶지만. 우리 사람들은 어떻게 구별을 하실까요?
“28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3:28)
“11 거기에는 그리스인과 유대인도, 할례 받은 자와 할례받지 않은 자도, 야만인도 스구디아인도, 종도 자유인도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 (골로새서 3:11)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무엇으로 어떻게 구별하시고 나누고 하실까요? 뭔가 숨겨진 비밀, 우리가 모르는 그런 비밀스런 방법, 기준을 주님은 갖고 계실까요?
“34 그 때에 임금은 자기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사람들아, 와서, 창세 때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35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어 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할 것이다. . .” (마태복음서 25:34-36)
우리가 예상했던 기준이나 구별 방법이 아닙니다. 사실 쉽고 간단해 보입니다. 당연히 우리는 주님께서 배가 고프시면 먹을 것을 드릴 것이고, 목마르시면 마실 것을 드릴 것이고, 길 위에 선 나그네로 머리 두실 곳도 주무실 곳도 없으시면 내 방을 내어드릴 것이고, 입을 옷이 없으실 때 내 옷이라도 벗어 드릴 것이고, 아프시면 당연히 돌보아 드릴 것이고, 설사 감옥에 갇혀 계시더라도 물론 찾아가 뵐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41 그 때에 임금은 왼쪽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말할 것이다. '저주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서, 악마와 그 졸개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42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고, 43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병들어 있을 때나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지 않았다.'” (마태복음서 25:41-43)
어? 그런데 주님. 저는 그런 주님을 한 번도 뵌 적이 없는데요? 저는 그런 모습을 하시고 그런 처지에 계신 주님을 본 적도, 만난 적도, 그렇다고 들은 적도 없습니다. 당연히 그런 주님을 제가 봤다면 분명 그렇게 했겠지요. 하지만 전 주님께서 그런 모습으로 계신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맹세합니다.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주마등처럼 흐른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제 여기서 나는 죽는구나’ 하는 그 순간, 죽음이 내 코 앞에 있다고 느끼는 바로 그 순간, 그 짧은 찰나에 내 눈 앞에 영화 필름처럼 나의 지난 그 오랜 시간과 세월이 내 눈앞에서 빠르게 지나간다고 합니다. 달리는 말처럼 스쳐간다는 것입니다. 돌이키고 싶은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 순간입니다. 이미 너무 늦어버린 순간입니다.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다, 너무 무서운 말입니다. 삶과 죽음, 그 거리는 멀어 보이지만 그러나 겨우 종이 한 장 두께의 거리에 불과합니다.
종말, 세상 끝날,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때 그 날, 그 종말의 때에 대한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첫눈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첫눈과 함께 오실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인 주님을 기다리자 했지만, 그러나 신앙은, 그리고 신앙을 살아내는 것은 낭만이 아니고 낭만적이지 않습니다. 치열한 현실입니다.
“40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을 터이나,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41 두 여자가 맷돌을 갈고 있을 터이나,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42 그러므로 깨어 있어라. 너희는 너희 주님께서 어느 날에 오실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43 이것을 명심하여라. 집주인이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알고 있으면, 그는 깨어 있어서, 도둑이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44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는 시각에 인자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서 24:40-44)
깨어 있는다는 것, 깨어 기다린다는 것, 준비하고 있는다는 것. 비유가 아닌 상징이 아닌 현실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지금 비유로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이렇게 해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희는 내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41 그 때에 임금은 왼쪽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말할 것이다. '저주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서, 악마와 그 졸개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42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고, 43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병들어 있을 때나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지 않았다.'” (마 25:41-43)
돌이키기엔 너무 늦는다, 그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44 . . .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도 돌보아 드리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마 25:44)
절대 나는 그런 일 없습니다. 그럴리가요? 돌이킬 수 없다니요? 제가 하지 않은 일, 제가 모르는 일에 대해 저에게 책임을 물으시면 안됩니다. 주님은 공의의 하나님, 정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이건 아닙니다. 저는 그런 적이 없습니다. 제가 하지도 않은 일에 대해 책임을 질 수는 없습니다. 돌이킬 수 없다니요? 돌이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럴까요?
“19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20 그런데 그 집 대문 앞에는 나사로라 하는 거지 하나가 헌데 투성이 몸으로 누워서, 21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려고 하였다. 개들까지도 와서, 그의 헌데를 핥았다. 22 그러다가, 그 거지는 죽어서 천사들에게 이끌려 가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었고, 그 부자도 죽어서 묻히었다. 23 부자가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다가 눈을 들어서 보니, 멀리 아브라함이 보이고, 그의 품에 나사로가 있었다. 24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기를 '아브라함 조상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나사로를 보내서,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서 내 혀를 시원하게 하도록 하여 주십시오. 나는 이 불 속에서 몹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25 그러나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되돌아보아라. 네가 살아 있을 동안에 너는 온갖 호사를 다 누렸지만, 나사로는 온갖 괴로움을 다 겪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통을 받는다. 26 그뿐만 아니라,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가로 놓여 있어서, 여기에서 너희에게로 건너가고자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에게로 건너올 수도 없다.'” (누가복음서 16:19-26)
“주님, 억울합니다. 그때 내 집 대문 앞에 구걸하고 있었던 그 나사로가 주님이신 걸 내가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몰랐습니다, 정말입니다.”
“그래 그때 너는 나를 몰라봤다. 그러나 그게 한 번도 두 번도 아니었다. 나는 너를 그리고 너의 집 문을 계속 두드렸었다.”
“27 부자가 말하였다. '조상님, 소원입니다. 그를 내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28 나는 형제가 다섯이나 있습니다. 제발 나사로가 가서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은 고통 받는 이 곳에 오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29 그러나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30 부자는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아브라함 조상님,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누가 살아나서 그들에게로 가야만,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31 아브라함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누가 살아난다고 해도, 그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누가복음서 16:27-31)
“주님, 정말 몰랐습니다. 알았다면 내가 그랬겠습니까? 그렇다면 적어도 내 형제들이라도 살게, 나사로를 그들에게 보내시면 안되겠습니까? 내 형제들이라도 너무 늦기 전에 돌이킬 수 있도록, 돌이켜 살도록 해주십시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누가 살아난다고 해도, 그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런 변명과 핑계를 댈 생각은 말아라. 나는 너희에게 나의 말을 기록한 성경을 통해 직접, 그리고 더 자주는 누군가를 통해 셀 수도 없이 이렇게 저렇게 가르쳤었다. 나는 이런 저런 사람들을 수도 없이 너희에게 보냈고, 이런 저런 사건과 상황을 보여주었고, 누군가의 행동을 통해, 누군가의 삶을 통해 너희에게 말했고, 보여주었고, 들려주었다. 나처럼, 내가 가르친 대로, 내가 살았던 대로, 내가 보여준 대로, 그리고 네가 나를 믿은 대로, 네가 나를 안다고 하는 대로 그렇게 하라고 그렇게 살라고 당부도 하고 권고도 하고 명령도 하였다. 그런데, 너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너는 나를 보려고 하지 않았고, 볼 마음도 없었다. 나의 말을 듣기는 들었지만, 나의 삶을 보기는 보았지만, 나를 알기는 알았지만, 그리고 나를 믿기는 믿었지만, 과연 네가 정말 나의 말을 들었는지, 나의 삶을 보았는지, 내가 선포하고 가르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알았는지, 그래서 내 아버지를, 그 아들인 나를,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믿었는지, 정말 네가 나를 믿었는지. 그래서 모든 질문의 답은 바로 너의 삶인데, 너의 삶으로 그 대답이 드러나야 하는데.
그때 거기 네 집 대문 앞에 있던 나는 너에게 무엇이었느냐? 그때 거기 길 위에서 갈 곳이 없고, 먹을 것이 없고, 쉴 곳이 없고, 입을 것이 없고, 말을 건네는 사람도 말을 건넬 사람도 없던 나는 너에게 무엇이었느냐? 그리고 지금 여기, 마지막 때, 마지막 날 내 앞에 서 있는 너에게 나는 무엇이냐? 너에게 나는 정말 무엇이었고, 누구였느냐?”
우리 어떻게 대답할까요?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때, 내가 주님 앞에 서는 그 날, 그렇게 물으시면 우리 어떻게 대답을 할까요? 사실, 오늘 말씀은 뜨거운 여름, 우리를 서늘하게 만드는 말씀입니다. 불로 멸망하고 얼음으로 멸망하는 그런 것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그게 주님이신 줄 정말 몰랐습니다 그 말이 내 입밖으로 나오는 것, 그것이 정말 무서운 것입니다.
‘나는 너를 모른다, 나에게 너는 모르는 사람이다’, 하고 말씀하시진 않을까 그게 사실은 무섭고 두려운 것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 주님께서 물어보실 것입니다. 너는 나에게 무엇을 하였느냐? 너는 나에게 무엇을 주었느냐? 너는 어디서 무엇을 하다 왔느냐? 너는 그리고 왜 혼자 왔느냐? 그 때에 우리는 어떻게 대답을 할까요? 너무 늦기 전에, 돌이킬 수 없기 전에 이 질문에 미리 대답을 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44 . . .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도 돌보아 드리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마 25:44)
그 때에는 너무 늦습니다. 하나님 나라, 그 문은 언제까지나 열려 있지 않습니다.
“34 그 때에 임금은 자기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사람들아, 와서, 창세 때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마태복음서 25:34)
δεῦτε/come, ‘와라’ ‘와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와라’, ‘come’. 주님께서 우리에게 처음 말씀하진 것이 아닙니다. 이미 주님은 수 십 수 백 번 하시고 또 하셨습니다. 이미 우리 모두에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 음성을 듣지 못했을 뿐이고, 우리가 그 음성을 무시했을 뿐이고, 우리가 그 음성에 ‘예’하고 응답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18 예수께서 갈릴리 바닷가를 걸어가시다가, 두 형제,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와 형제간인 안드레가 그물을 던지고 있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9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나는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삼겠다." 20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마태복음서 4:18-20)
δεῦτε/come, ὀπίσω/after, come follow me
“35 다음 날 요한이 다시 자기 제자 두 사람과 같이 서 있다가, 36 예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서, "보아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 하고 말하였다. 37 그 두 제자는 요한이 하는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갔다. 38 예수께서 돌아서서,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물으셨다. "너희는 무엇을 찾고 있느냐?" 그들은 "랍비님,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랍비'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다.) 39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와서 보아라." 그들이 따라가서, 예수께서 묵고 계시는 곳을 보고, 그 날을 그와 함께 지냈다. 때는 오후 네 시 쯤이었다.” (요한복음서 1:35-39)
ἔρχομαι/come
우리를 주님의 제자로 부르신 그때, 우리를 향한 첫 말씀이 바로 ‘와라’ 입니다. 그리고 그 ‘와라’의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 여러분과 저는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앙 고백을 했습니다. 그리고 신앙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그 마지막 날, 주님이 다시 오실 그 때, 우리가 들어야 할 마지막 그 말씀 역시 바로 ‘와라’ 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낼 믿음은 바로 그 오실 주님께 ‘어서 오시옵소서’ 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을 제대로 살아낸 우리의 소망은 이것이고 또한 우리의 기도 역시 이것입니다.
“20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요한계시록 22:20, 개역개정)
ἔρχομαι/come
그리고 그 곧 오실 주님께 우리가 매일 드리는 기도는 이것입니다.
“21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있기를 빕니다. 아멘.” (요한계시록 22:21)
주 예수의 은혜가 나와 우리 뿐만이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사람에게 있기를 비는 것, 기도하는 것, 그리고 그 기도를 살아내는 것, 그리고 그 기도에 ‘아멘’하며 이루어질 것을 믿는 것입니다.
“24 그러므로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다 자기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고 할 것이다. 25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서,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그 집을 반석 위에 세웠기 때문이다. 26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서도 그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자기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고 할 것이다. 27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서, 그 집에 들이치니, 무너졌다. 그리고 그 무너짐이 엄청났다." (마태복음서 7:24-27)
그리고 그 믿음을 그 소망을 그 기도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살아내는 것.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이고 명령이고 당부이고 또한 마지막 설교의 가르침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주 예수의 은혜가 있기를 바라는 것, 기도하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내가 우리가 그 주님의 은혜의 통로가 되는 것, 그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이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오늘 주님의 마지막 설교인 ‘최후의 심판에 대한 설교’는 주님의 첫 설교인 ‘산상 설교’와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 여기 마태복음서 25장의 ‘최후의 심판에 대한 설교’는 마태복음서 5장의 ‘산상 설교’와 함께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 선포와 가르침의 쌍벽을 이루고 있습니다. 허투루 들을 말씀이 아니고, 읽고 넘길 말씀도 아니고, 신학 혹은 신앙의 지식이나 정보로 그냥 책장에 꽂아두고 가끔 들춰 읽는 말씀도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야 할 말씀입니다. 이게 복이고 이런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이고, 이런 삶이 복을 받는 삶이고 이런 삶을 산 사람이 하나님 나라, 그 복을 차지할 것입니다.
“그때 거기, 너는 나에게 먹을 것을 주었고, 마실 것을 주었고, 나를 네 집으로 맞아 주었고, 나를 입혀 주었고, 나를 돌보아 주었고, 나를 찾아 주었다. 너는 나에게 사랑을 주었고 사랑을 했다. 이제부터 나는 너에게 영원히 먹을 것을 줄 것이고, 나는 너에게 영원히 마실 것을 줄 것이고, 나는 너를 내 아버지 집으로 맞을 것이고 영원히 내 아버지 집에서 나와 함께 살 것이고, 나는 너를 영원히 아버지의 영광으로 입혀 줄 것이고, 나는 너를 영원히 내 아버지의 자녀로 돌볼 것이고, 나는 그리고 내 아버지는 너에게 영원한 사랑을 줄 것이고 영원히 사랑을 할 것이다.
그리고 정말은, 나에게 나의 아버지에게 너는 이미 사랑의 존재였고, 지금도 사랑의 존재이고, 그리고 영원히 사랑의 존재가 될 것이다. 너는 나에게, 그리고 나는 너에게 영원한 사랑이다.”
주님께서 지금 여러분과 저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나에게, 그리고 나는 너에게 무엇이냐? 너는 나에게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리고 나는 너에게 무엇이냐?”
여기 너무 늦기 전에, 돌이킬 수 없기 전에, 죽음 직전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지난 삶을 땅을 치고 후회하기 전에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 가운데 계신 주님을 알아보았던 한 사람이 있습니다. 노예 무역상으로 살다가 어느 날, 그 노예들 사이에 계신 그리스도 예수, 죽어가는 노예들 사이에서 신음하며 죽어가는 그 노예들과 함께 계신 주님을 알아본 사람, 바로 아프리카에서 600명의 노예들을 배에 실었지만, 영국에 도착하면 겨우 200명 살아남는 노예선의 선장으로, 노예 무역상으로의 삶을 살았던 John Newton입니다. 노예들은 사고 팔 그런 짐승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하나님의 사람들이고, 오히려 내가 바로 원숭이 같은 짐승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John Newton,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그 주님의 은혜가 너무 놀랍고 감사하다고, 나머지 삶을 죄인으로, 그러나 용서받은 죄인으로 살았던 John Newton의 신앙 고백을 가사로 한 찬송가, <Amazing Grace, 나 같은 죄인 살리신>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하리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