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예수께서 올리브 산에 앉아 계실 때에, 제자들이 따로 그에게 다가와서 말하였다. "이런 일들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선생님께서 다시 오시는 때와 세상 끝 날에는 어떤 징조가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마태복음서 24:3)
“36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각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 (마 24:36)
“24:50 생각하지도 않은 날에, 뜻밖의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 . .” (마 24:50)
“25:13 그러므로 깨어 있어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각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 25:13)
답은 이미 나와 있습니다. 깨어 있으면 됩니다. 그런데 그 날과 그 때를 모르는데 하염없이 어떻게 깨어 있을까요? 언제까지 불면의 밤을 보낼까요?
주님께서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앞에 들려주신 두 개의 이야기와 다른 듯 같은, 같은 듯 다른 이야기입니다. 조금은 더 심각한 이야기입니다.
“14 또 하늘 나라는 이런 사정과 같다.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자기 종들을 불러서, 자기의 재산을 그들에게 맡겼다. 15 그는 각 사람의 능력을 따라,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주고, 또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주고, 또 다른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다.” (마 25:14-15)
여기 종은 정확히 말하면 하인(servant)이 아닙니다. 그리스어 δοῦλος는 노예(slave)를 말합니다. 주인이 자기 노예들을 불러, 그들에게 자기의 재산을 맡겼다는 말입니다. 한 달란트(talent)는 6천 데나리온(denarius)에 해당하는 돈입니다. 그때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한 한 달란트의 돈은 노동자가 일년 365일 중 300일간 아침부터 저녁까지 꼬박 일해서 번 돈을 아무데도 쓰지 않고 20년간 모아야 손에 넣을 수 있는 돈입니다. 가장 적게 받았다 하는 그 한 달란트 역시 한 사람이 평생 일해야 겨우 모을까 말까 한 어마어마한 액수의 돈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누구는 다섯 달란트, 누구는 두 달란트, 누구는 한 달란트를 받았다 하는 것은 우리를 향한 주인, 즉 하나님의 은총, 은혜를 말씀하고 계신 것이지, 각 사람의 그 능력에 따라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복 혹은 은혜를 차별해서 각각 다르게 주셨다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습니다. 그래도 똑같은 달란트를 나누어 주시는 것이 평등이고 공평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3 나는 내가 받은 은혜를 힘입어서, 여러분 각 사람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마땅히 생각해야 하는 것 이상으로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분수에 맞게 생각하십시오. 4 한 몸에 많은 지체가 있으나, 그 지체들이 다 같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5 이와 같이, 우리도 여럿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있으며, 각 사람은 서로 지체입니다. 6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따라, 우리는 저마다 다른 신령한 선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령, 그것이 예언이면 믿음의 정도에 맞게 예언할 것이요, 7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또 가르치는 사람이면 가르치는 일에, 8 권면하는 사람이면 권면하는 일에 힘쓸 것이요, 나누어 주는 사람은 순수한 마음으로, 지도하는 사람은 열성으로, 자선을 베푸는 사람은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로마서 12:3-8)
공장에서 물건을 찍어내 듯, 똑같은 모습으로 창조되어 똑같은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평등, 공평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구원으로의 부름을 똑같이 받았다는 것. 그러나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시는 주님께서 구원으로 부르신 나에게 꼭 맞는 내 몫의 일을 맡기셨다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평등이고 공평입니다.
“8 저녁이 되니, 포도원 주인이 자기 관리인에게 말하기를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사람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사람들에게까지, 품삯을 치르시오' 하였다. 9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을 한 일꾼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다. 10 그런데 맨 처음에 와서 일을 한 사람들은, 은근히 좀 더 받으려니 하고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다. 11 그들은 받고 나서, 주인에게 투덜거리며 말하였다. 12 '마지막에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는데도, 찌는 더위 속에서 온종일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하였습니다.' 13 그러자 주인이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기를 '이보시오, 나는 당신을 부당하게 대한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14 당신의 품삯이나 받아 가지고 돌아가시오. 당신에게 주는 것과 꼭 같이 이 마지막 사람에게 주는 것이 내 뜻이오. 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내가 후하기 때문에, 그것이 당신 눈에 거슬리오?' 하였다. 16 이와 같이 꼴찌들이 첫째가 되고, 첫째들이 꼴찌가 될 것이다." (마 20:8-16)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받은 종에 대한 이야기는 종들 각자의 능력의 차이, 그 차이에 따른 차별된 은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로 우리를 구원으로 부르신 아버지 하나님, 그 하나님의 나라로 부름받은 우리의 ‘다름’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누구는 더 사랑하고 누구는 덜 사랑하고, 그래서 누구에게는 더 큰 것을 주었고 누구에게는 작은 것을 주는 차별의 사랑, 차별의 은총이 아닙니다. 서로가 서로를 비교해 보고, 내가 무엇을 더 받았고 너는 무엇을 덜 받았고, 나는 무엇을 덜 받았고 너는 무엇을 더 받았는지 비교하고 확인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있는 것 그리고 나에게 없는 것이 핑계와 구실 그리고 판단의 근거로 삼아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를 비교하며 누가누가 잘하나 경쟁하고 좌절하고 절망하면서 살아라, 삶은 경쟁이다, 신앙도 경쟁이고 신앙 생활도 경쟁이다, 교회 밖도 경쟁이고 교회 안도 경쟁이다, 따라서 누가누가 잘하나 올림픽 게임으로, 무한 경쟁으로 살라는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머리가 손에게 말하기를 너는 왜 제대로 걷지도 뛰지도 못해 몸을 넘어지게 만들었느냐, 머리가 발에게 말하기를 너는 왜 그걸 제대로 움켜잡지 못해 몸이 벼랑에서 떨어지도록 했느냐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손은 손의 역할을 하고, 발은 발의 역할을 하고. 그래서 각 지체가 그 맡은 분량대로, 그 맡겨진 일을 함으로 몸이 함께 자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들 중에 그 어느 누구도 나의 능력 그 이상의 것을 나의 주인으로부터 요구 받지 않을 것이고, 내가 받은 것 그 이상의 책임을 주인은 나에게 묻지 않으십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우리 모두가 각자의 그 몫을 하고, 그 하나님 나라 그 안으로 함께 들어가 주님께서 차려 놓으신 그 잔치자리에 함께 앉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이고, 하나님 나라의 평등이고 공평이고, 그것이 구원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주인이 종들에게 그 어마어마한 재산을 맡기면서 어떤 조건도 달지 않았고, 어떤 요구도 없었고, 어떤 지시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단지 어느 날 주인이 자기의 종들을 불러서 자기의 재산을 맡기고는 언제 돌아올 것이다 하는 그 날도 말하지 않은 채 훌쩍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종들은 종들에게 맡긴 재산을 제 맘대로 해도 될까요?
주인이 ‘자기의’ 종들을 ‘불렀다’는 말은, 그 종들은 주인의 소유로서 주인에게 속한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주인의 것입니다. 따라서 주인이 자기 종들을 불러 자기 재산을 맡겼다는 말은 ‘나에게 속한’ ‘나의 종들’에게 내가 없는 동안에 ‘나에게 속한’ ‘나의 재산’을 잘 관리하고 운영하라는 ‘임무’를 맡겼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인인 내가 다시 돌아올 그 날 그 때 주인인 나는 내가 믿고 맡긴 그 일에 대한 책임을 나의 종들인 너희에게 당연히 묻겠다 하는 것입니다. 주인은 떠났고 모든 것은 종들의 책임입니다. 그렇다면 이 종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인은 도대체 나를 뭘 믿고 뭘 보고 자기의 그 큰 재산을 나에게 맡기고 떠났을까?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돈을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44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 놓은 보물과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발견하면, 제자리에 숨겨 두고, 기뻐하며 집에 돌아가서는,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 밭을 산다." 45 "또 하늘 나라는, 좋은 진주를 구하는 상인과 같다. 46 그가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면,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것을 산다." (마 13:44-46)
하루하루 날품을 팔아 겨우 입에 풀칠 했던 나와 나의 가족. 그런데 어느 날 열심히 밭을 갈던 나의 눈에 드러난 그 밭에 숨겨진 보물을 발견했습니다. 주체할 수 없는 기쁨에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말고 할 겨를이 없이 당장 집으로 뛰어가, 내 가진 모든 것 죄다 들고 나가서 모두 팔아 그 밭을 사는 것입니다. 세상에 없는 좋은 진주를 찾아 이 나라 저 나라 온갖 고생을 하며 헤매던 끝에 마침내 그 진주 하나를 발견하고는, 감당할 수 없는 기쁨으로 그간의 모든 고생은 온데간데 없고, 두 번 세 번 생각할 이유도 필요도 시간도 없이, 내 가진 모든 것을 다 팔아 그 진주 사는 것입니다. 내 눈에 드러난 그 보물, 내가 발견한 그 진주 하나를 사기 위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팔아, 대신 그 보물, 그 진주를 사는 것입니다. 나의 가진 것을 포기해야 하는 위험을 감수하고, 그 보물, 그 진주를 과감히 사는 모험을 감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인의 재산을 맡게 된 종들이 해야 할 일이었고,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았던 종들은 했던 일입니다.
“16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곧 가서, 그것으로 장사를 하여, 다섯 달란트를 더 벌었다. 17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도 그와 같이 하여, 두 달란트를 더 벌었다.”
“16 Immediately, the servant who had received ifve talents moved out, went to work with them, and won five more. 17 In the same way the two-talented servant won two more.” (마 25:16-17)
‘곧’ 가서 . . . , ‘immdediately’, 생각을 하고 말고 할 것이 없이 달란트를 받자마자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를 해서 다섯 달란트를 벌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기쁨에서 나온 행동입니다. 주인이 노예인 나에게 주인의 그 어마어마한 재산을 맡겼다는 그 사실. 나의 주인이 나에게 아무런 조건도 없이, 요구 사항도 없이, 이래라저래라 어떤 말도 없이 나를 믿고 나에게 자기의 큰 재산을 맡겼다는 사실. 그것이면 이 종들은 충분했습니다. ‘죽어 있는 믿음’이 아니라, ‘살아 있는 믿음’을 하고 있고 또한 살고 있는 종들입니다. 박물관에 전시된 ‘박제된 믿음’이 아니라, 펄펄 살아 ‘걷고 뛰는 믿음’입니다. 행동하는 믿음, 움직이는 믿음입니다. 능동적인 믿음, 개입하고 참여하는 믿음입니다. 주인의 일에 부름받은 내가 그 주인이 나에게 맡긴 일, 주인의 일을 내가 이제 하게 된 것입니다. 주인이 나에게 맡긴 달란트는 나에게 두려움도 걱정도 근심도 불안도 아니고, 나에게 오직 기쁨이고 설렘이고 감격입니다. 주인이 나를 믿는다, 나를 신뢰한다, 나를 사랑한다, 그래서 주인이 나에게 자기의 재산을 맡겼다는 그 사실이 나에게는 영광이고 축복이고 은혜입니다.
“18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가서, 땅을 파고, 주인의 돈을 숨겼다.” (마 25:18)
그런데 왜 이 종은 그 달란트를 받은 후, 며칠을 고민하다 기껏 한다는 게 땅을 파고 거기에 그 돈을 숨기는 것이었을까요? 무슨 생각으로 그랬을까요? 다섯 달란트가 되었든, 두 달란트가 되었든, 한 달란트가 되었든, 노예로서 종으로서 그 받은 것이 이미 엄청난 것인데. 다른 종들과 달리 이 종은 왜 땅을 파고 달란트를 숨겼을까요? 남들과 비교하니 자기 것이 너무 적어서 그랬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24 그러나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다가와서 말하였다. '주인님, 나는, 주인이 굳은 분이시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줄로 알고, 25 무서워하여 물러가서, 그 달란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여기에 그 돈이 있으니, 받으십시오.'” (마 25:24-25)
“나는 주인님 당신이 굳은 분이시고, 심지어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그런 주인이시라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주인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 종은 주인에 대해 몰랐습니다. 자기 주인이 어떤 주인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자기 종에게 아무런 조건도 요구도 없이 자기 재산을 믿고 맡길 정도의 주인, 알아서 해라 그 말도 없이 훌쩍 여행을 떠날 정도의 주인, 그 주인이 정말 어떤 주인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주인이십니다’ 네 맞습니다. 하나님은 심지도 않으시고 거두십니다. 뿌리지도 않으시고 모으십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 말씀으로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그런 하나님께서 무엇이 아쉬워 종들에게 당신의 것을 맡기셨을까요?
“1:26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그리고 그가,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 사는 온갖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창세기 1:26-27)
“2:15 주 하나님이 사람을 데려다가 에덴 동산에 두시고, 그 곳을 맡아서 돌보게 하셨다.” (창 2:15)
무엇을 심을 필요도 없이, 무엇을 뿌릴 필요도 없이, 원하는 것을 거두시고 만드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왜 굳이 당신께서 창조하신 사람, 그 종에게 당신의 창조 세계를 맡기셨을까요? 굳이 사람을 시켜 당신의 창조 세계를 관리하게 하셨을까요? 세상을 만들어놓고 보니, 관리하는 것이 어렵고 귀찮고, 그래서 사람을 창조하시어 거기 에덴 동산에 두고서는, ‘이제부터 네가 해라, 네가 관리해라’ 맡기셨을까요?
“19 주 하나님이 들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를 흙으로 빚어서 만드시고, 그 사람에게로 이끌고 오셔서, 그 사람이 그것들을 무엇이라고 하는지를 보셨다. 그 사람이 살아 있는 동물 하나하나를 이르는 것이 그대로 동물들의 이름이 되었다. 20 그 사람이 모든 집짐승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다. . .” (창 2:19-20)
너에게 다섯 달란트를 맡겼으니 너는 다섯 달란트는 남겨야 하고, 너에게는 두 달란트를 맡겼으니 뭘 해서든 두 달란트 정도는 남겨야 하고, 그리고 너에게는 비록 한 달란트만 맡기지만 너 역시 적어도 한 달란트는 남겨야 한다, 그게 주인이신 하나님의 요구일까요? 나 없는 사이에 정신 똑바로 차리고 많은 이익을 남겨라, 그게 하나님의 뜻일까요?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신데, 그 이름 하나 짓지 못해 아담에게 이름 짓는 일을 시키신 것이 아닙니다. 당신께서 하기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라, 이젠 좀 쉬겠다, 그래서 아담을 시켜 에덴 동산을 맡아 돌보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아담과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 세계, 하나님의 창조의 일,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 그 새로운 창조의 일에 구경꾼도 아니고 관객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에 참여하는 일꾼이며 하나님의 구원의 드라마의 배우이기 때문입니다.
“20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주인님, 주인께서 다섯 달란트를 내게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다섯 달란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였다. 21 그의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잘했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많은 일을 네게 맡기겠다. 와서,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려라.'” (마 25:20-21)
“주인님 이걸 보십시오. 주인께서 나를 믿고 다섯 달란트를 맡기셨는데, 그 믿음을 저버리지 않으려고 주인의 것을 갖고 주인께서 계시지 않은 동안에 내가 이렇게 했습니다. 나를 믿고 나에게 거저 주신 그 은혜, 그 구원의 은혜를 이렇게 살았습니다, 그 주신 은총이 아니었으면 나는 도무지 이렇게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선 우리의 감사이고 겸손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그 구원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고, 그리스도 예수의 제자로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입니다.
“잘했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많은 일을 네게 맡기겠다. 와서,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려라.”
적은 일에 신실했으니, 이제 더 많은 일을 너에게 맡기겠다 하십니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살아야 할 삶을 충실히 살아내는 것으로 그러나 그것으로 우리의 일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더 많은 일, 더 큰 일을 우리에게 맡기십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영화제 시상식에서 배우 황정민이 이런 수상 소감을 해서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나는 단지 스탭들이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얹었을 뿐이다.”
하나님의 첫 창조에 이은 새 하늘과 새 땅, 그 두 번째 창조인 구원의 드라마 그 속에 우리 모두는 구경꾼이나 관객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똑같이 배우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누구는 다섯 달란트의 배우, 누구는 두 달란트의 배우, 누구는 한 달란트의 배우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한 배우가 갑자기 분장실로 다시 들어가더니 거기 옷장 속에 숨어 도무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초대 받은 그 무대 그 위에 배우로 서는 것이 무섭고 두렵다고 무대에 서기를 거부합니다. 실수하면 어떡하느냐, 그러다 잘못하면 어떡하느냐, 나중에 연출자가 와서, 감독이 와서 나를 혼낼 텐데. 다른 배우들이 나를 욕할 텐데. 관객들이 웃고 비난하고 난리가 아닐 텐데. 그러더니 갑자기 난 그냥 저기 객석에 앉아 구경이나 하겠다고 얼굴에 분장을 한 채로, 의상도 입은 채로 객석으로 뛰어갑니다. 어떻게 할까요? 물고기가 물이 무섭고 두렵다고 뭍으로 올라가는데 어떻게 할까요?
“26 그러자 그의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너는 내가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 알았다. 27 그렇다면, 너는 내 돈을 돈놀이 하는 사람에게 맡겼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내가 와서,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받았을 것이다.” (마 25:26-27)
“26 . . . You wicked, lazy slave!” (NIV, NRSV)
“26 . . . You wicked/evil, cowardly/timorous slave!” (R. T. France, David Bentley Hart)
그냥 게으른 종이 아닙니다. ὀκνηρός 여기 ‘게으른’이라고 번역이 된 그리스어는 ‘겁 많은’, ‘자신이 없는’, ‘소심한’, ‘두려워하는’ 이라는 뜻을 또한 갖습니다. 그 종이 단순히 일하기 싫고 게을러서 땅을 파고 거기에 달란트를 묻은 것이 아닙니다. 그 종은 생각이 너무 많았습니다. 주인이 믿고 돈을 맡긴 그 나를 정작 내가 믿지 못합니다. 그 주인도 믿지 못합니다. 나의 행동의 결과가 너무 두렵고, 돌아 올 그 주인이 두렵습니다. 실수를 할까 싶어, 뭘 잘못할까 싶어, 그러면 언젠가 주인이 돌아와서 나를 나무랄까, 나를 혼낼까, 나를 이 집에서 쫓아낼까 그게 무섭고 두렵습니다. 그러니 주인이 나를 믿고 맡긴 그 재산은 나에게는 사랑이 아니고, 은혜가 아니고, 자비도 아니고, 단지 나에게 너무 큰 부담이고 근심이고 걱정이고 불안이고 두려움일 뿐입니다. 감사할 일도 아니고 기뻐할 일도 아닙니다. 그래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가만히 있었던 것입니다.
‘구원은 나의 믿음으로 얻는 것이지, 나의 행위로 얻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말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나의 신앙과 신앙의 삶에 대한 핑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일은 주님께서 다 하십니다, 아무 것도 아닌 나, 벌레와 같은 나는 그저 주님만 따를 뿐입니다’, 겸손처럼 신실한 신앙인처럼 들리는 이 말이 무대 위가 아닌 객석에 숨어, 차마 앉지 서지도 못한 채로 몰래 지켜보는 어리석은 배우의 변명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믿음 그리고 믿음을 살아가는 것은 자전거를 타는 것과 같습니다. 너무 높다고, 오르막 길이라고, 너무 힘이 든다고 멈추면 저 아래로 떨어집니다. 내리막이라고 페달 밟지 않아도 저절로 간다고, 그냥 주변 경치나 보겠다고, 페달에 발 떼고 넋을 놓고 있다가는 그만 저 아래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집니다. 페달을 밟고 또 밟다가 힘이 들면 힘이 드는 대로 천천히 밟고, 힘이 조금 생기면 그 힘을 다해 다시 열심히 그 페달을 밟아야 합니다. 잠깐 힘이 들어 숨 고르기 위해 그 페달 멈출 수는 있어도, 그래서 오던 힘으로 가던 힘 그 상태로 조금은 더 앞으로 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곧 다시 그 페달 밟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멈추고 맙니다.
신앙은 오르막의 위험도 내리막의 모험도 감수해야 합니다. ‘여기 가만히 있겠다, 주신 은혜, 받은 은혜, 그것이면 족하다, 하나님께서 다 하신다, 주님이 알아서 인도하신다, 그 주님을 나는 무한 신뢰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믿음 뿐, 여기 가만히 있겠다.’ 겸손한 믿음, 신실한 신앙으로 보이지만, 그건 내가 받은 달란트를 땅에 묻는 사람의 변명이고 핑계일 수 있습니다. 아예 내가 판 땅에 내가 들어가 눕는 것, 거기 내 무덤삼아 내가 나를 묻는 것일 수 있습니다. 믿는다 하면서 여기 가만히 있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그것은 주님께서 내게 맡긴 달란트를 땅에 숨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땅에 숨는 것이고, 주님께서 주신 은혜를 버리는 일이고, 주님을 피해 바위와 나무 그 뒤에 내가 숨는 것입니다.
‘아담아 어디 있느냐?’ 그 아버지 하나님을 피해 더 이상 숨지 말아야 합니다. 어디 숨을 곳 없나 이리저리 찾는 나를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만 하라고. 더는 숨지 말라고, 더는 나를 피하지 말라고, 더는 나에게서 도망치지 말라고. 너는 내가 사랑하는 내 아들이고 내 딸이니 이제 그만 나오라고. 더 이상 그럴 이유도 필요도 없으니 거기 바위 뒤, 나무 뒤에서 그만 나오라고. 내 아버지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는 그 목소리가 그리스도 예수이시고, 그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혜이고 구원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맡겨 주신 달란트입니다.
‘방법을 가진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이성복 시인의 말입니다. 받은 사랑을 어떻게 돌려줄까, 그 방법을 고민하고 고민하다 그 사랑이 너무 커 감히 내가 어떻게 돌려줄까, 내가 그 사랑을 받을만한 사람이 아닌데, 내가 어떻게 그 사랑을 감당할까, 방법이 뭘까? 방법을 가진 사랑은 사랑이 아니고, 부담일 뿐이고, 의무일 뿐이고, 결국 두려움일 뿐입니다. 차라리 그냥 가만히 있을까, 숨어버릴까, 묻어 버릴까 . . .
주님께서 주신 그 한 없는 사랑을 나의 초라한 두려움으로 막으려 하지 마십시오. 나에게 값 없이 온 사랑인데. 그 값을 내가 매기고, 내가 그 값을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그 사랑을 내가 해낼 수 있을까, 살아갈 수 있을까, 그 사랑을 내가 할 수 있을까, 주님을 사랑하기 앞서, 사람을 사랑하기 앞서 방법을 먼저 생각하고, 그 방법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그걸 먼저 생각하고, 그러다 점점 두려움이 커가, 결국에는 두려움이 사랑을 지배합니다. ‘와서,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려라’, 하나님 나라를 내가 사는 것, 하나님 나라를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아버지와 함께 꾸려가는 것, 그것이 기쁨입니다.
‘가만히만 있으면 중간은 간다.’
그러나 신앙에 중간은 없습니다. ‘초대 받은 사람은 많지만, 선택 받은 사람은 적다’. 선택을 받거나 받지 못하거나 둘 중에 하나지, 신앙에, 신앙의 삶에 중간은 없습니다. 가만히 있는 것은 뒤로 가는 것도 아니고 그냥 거기 뒤에 영원히 홀로 남겨지는 것입니다. 구원의 열차표 들고 가만히 거기 선 채로 있는 것, 그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나에게 지금 달려오는 그 열차에 내가 내 몸을 실어야 합니다. 누가 나를 들어 그 열차에 던져주지 않습니다. 나는 누가 들어 집어 던질 그런 물건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드라마, 거기엔 누구도 관객일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 드라마에 배우로 부름받은 배우입니다. 관객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무대 위 주인공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십니다. 그 분이 바로 무대 위 로미오이고, 우리는 줄리엣입니다. 실수할까 두렵다구요, 대사를 까먹을까 무섭다구요, 어디로 등장해서 어디로 퇴장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구요, 무대 위에 오르니 눈 앞에 아무 것도 안 보이고 그저 새하얘진다구요? 무대 공포증이 있어 너무 힘이 든다구요?
‘연습은 실전처럼, 실전은 연습처럼’. 올림픽 그 출전 선수들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실수할 자격, 실패할 자격이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걱정할 필요도, 두려워 떨 필요도 없습니다. 지금 여기 이 땅에서 여러분과 제가 참여하는 그 구원의 드라마는 연습이고, 리허설입니다. 틀려도 됩니다, 잘 못해도 되고,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 날과 그 때, 그 본 공연을 위해 우리는 지금 오늘 여기 그 연습을 하고 있고 리허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연습은 실전처럼, 실전은 연습처럼’ 해야 합니다. 연습이 없이, 리허설이 없이 공연은 없습니다. 그건 불문율입니다.
받은 은혜, 그 구원을 이 땅에서, 이웃 가운데서 두려움 없이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가만히 있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고, 페달 밟기를 멈춘 자전거는 넘어질 수 밖에 없고, 무대가 무섭다 떠난 배우는 연극이 끝난 후 홀로 남습니다. 우리에게는 실수할 권리가 주어졌고, 실패할 자격이 있습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 우리가 그럴만한 대단한 배우라서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그런 역할을 맡기신 것이 아닙니다. ‘괜찮다, 넌 할 수 있다, 내가 너를 지켜볼 것이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니, 내가 너를 가르칠 것이니, 내가 너의 상대역이 될 것이니, 못해도 된다, 틀려도 된다, 실수해도 된다, 그리고 실패해도 된다. 너는 내 아들이고 내 딸이니, 내 앞에서는 어떤 실수를 해도 어떤 잘못을 해도 다 괜찮으니, 나와 함께 무대에 서자. 구원의 무대 그 위에 오르자’, 그게 은총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 나라의 구원입니다.
실수가 무서워, 잘못할까 두려워, 그래서 주님이 나에게 화를 내실까, 벌을 주실까 무서워 벌벌 떠는 것, 그것이 우리의 신앙이 아니고, 받은 은혜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 아니고, 하나님의 극장, 그 무대에 초대받은 배우로서의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다. 내가 받아 든 그 대본, 그 구원의 은총을 내가 할 수 있는 대로, 할 수 있는 만큼 내가 일상에서 삶 속에서 어설퍼도 틀려도 그러나 부끄러움 없이, 두려움도 없이 해내는 것, 살아내는 것, 그것이 우리의 신앙이고 신앙하는 삶이고, 그것이 우리가 받은 달란트를 사는 길입니다.
신앙은 자전거 타기입니다. 그런데 혼자 자전거 타기 겁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자전거를 뒤에서 꼭 잡고 우리와 함께 뛰십니다. 언젠가 그 손 놓으실 텐데, 어떻게 하나구요? 벌써 주님께서 자전거 뒷바퀴에 예쁘고 튼튼한 보조 바퀴 두 개 이미 달아 놓으셨습니다. 성령이십니다.
믿음의 길, 위험과 모험을 감수하고 우리 가진 모든 걸 다 팔아, 하나님 나라의 보물을 사고, 하나님 나라의 진주를 사는 행동하는 믿음. 내 손에 맡겨진 달란트 보란 듯 들고나가 값진 보물 묻혀 있는 그 밭을 사고, 그 귀한 진주를 사는 걷고 뛰는 그 살아 있는 믿음. 그 믿음의 페달 힘차게 밟으며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함께 완주하시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