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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신앙인이 기억하는 많은 성경 속 인물들이 있습니다. 베드로, 요한, 그리고 바울을 비롯한 많은 사도들과 제자들, 아브라함, 모세, 그리고 다윗을 비롯한 많은 지도자들, 이사야, 예레미야, 그리고 에스겔을 비롯한 많은 예언자들. 그러나 알게 모르게 제일 많이 입에 올리고 또한 유명한 인물 중 한 명은 아마 이 사람일 것입니다. 

. . .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 . . (<사도신경> 중에서)

 

본디오 빌라도입니다. 그런데, 궁금합니다. 우리가 매번 신앙을 고백하면서 굳이 그 이름을 우리 입에 올리고 또 올리고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처럼 우리에게 있어 신앙의 모범이 되는 인물도 아니고, 주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은 당사자인 일종의 가해자인 본디오 빌라도, 그리고 부끄러움과 치욕의 이름을. ‘본디오 빌라도’라는 그 이름이 아니어도 충분히 나의 신앙, 우리의 신앙을 고백할 수 있을 텐데. 그런데, 정말 ‘본디오 빌라도’라는 아프고 슬픈 기억과 치욕의 이름을 지우고, 그래서 그 기억을 잊고 그 과거를 잊어도 우리는 충분히 우리의 신앙을 고백할 수 있고, 또 우리의 신앙을 잘 살아갈 수 있을까요?

 

  1.  

오늘 여기, 로마제국의 빌라도 총독의 재판정에 예수 그리스도께 서 계십니다.

 

“11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서시니, 총독이 예수께 물었다.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당신이 그렇게 말하고 있소" 하고 말씀하셨다. 12 예수께서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고발하는 말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13 그 때에 빌라도가 예수께 말하였다. "사람들이 저렇게 여러 가지로 당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데, 들리지 않소?" 14 예수께서 한 마디도, 단 한 가지 고발에도 대답하지 않으시니, 총독은 매우 이상히 여겼다.” (마태복음서 27:11-14)

“당신이 그렇게 말하고 있소”

가타부타(可타否), 옳다 그르다, 맞다 틀리다, 왜 확실하게 말씀하시질 않으실까요? 왜 애매모호하게 대답을 하실까요? 무슨 다른 생각이 있으신 걸까요? 왜 속 시원히 말씀을 하지 않으실까요? 

"사람들이 저렇게 여러 가지로 당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데, 들리지 않소?"

예수님은 지금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잘 모르고 계실까요? 지금 어떤 처지에 놓이신 것인지 정말 몰라 저러시는 걸까요? 

 

“9 다시 관저 안으로 들어가서 예수께 물었다. "당신은 어디서 왔소?" 예수께서는 그에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10 그래서 빌라도가 예수께 말하였다. "나에게 말을 하지 않을 작정이오? 나에게는 당신을 놓아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처형할 권한도 있다는 것을 모르시오?" . . .” (요한복음서 19:9-11)

침묵하십니다. 주님은 지금 상황 파악이 안되신 걸까요? 지금 이곳이 질문하는 이 사람이 누군지 설마 모르고 계신 걸까요?

 

“11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위에서 주지 않으셨더라면, 당신에게는 나를 어찌할 아무런 권한도 없을 것이오. 그러므로 나를 당신에게 넘겨준 사람의 죄는 더 크다 할 것이오." (요한복음서 19:11)

이걸로 봐서는 분명 알고 계신 것 같은데, 그런데 왜 주님은 침묵을 지키고 계신 걸까요?

지금 여기는 세속 권력, 세상 권력과 하나님 권력의 대결의 현장입니다. 어둠과 빛의 대결입니다.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조용합니다. 요란하고 소란스럽지 않습니다. 한 쪽은 일방적으로 공격하고 있고, 그 다른 한 쪽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사실 대결 자체가 성립되질 않습니다. 일방적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포기하신 것일까요? 하나님 권력, 그 빛이 포기한 것일까요? 왜 침묵을 하셨을까요? ‘네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 말씀은 왜 하신 걸까요? 

 

  1.  

知者不言, 言者不知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 56장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지자(知者)는 불언(不言)하고, 언자(言者)는 부지(不知)니라,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을 하는 사람은 모른다. 다시 말해, 참으로 아는 자는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고, 말이 많은 자는 참으로 알지 못하는 자라는 말입니다. 사실 뭘 잘 모르는 사람, 어설프게 아는 사람이 말이 많습니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속담도 같은 말입니다. 반대로 진리를 아는 사람은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지혜로운 사람,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 중에는 청산유수로 말을 잘하는 달변(達辯)인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어눌하게 말을 눌변(訥辯)인 사람이 많습니다. 그 말이 어눌하지만 그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진리의 말입니다. 반대로 참기름 바른 듯 번지르르한데 그 안에 진리가 없는 경우가 사실 더 많습니다. 침묵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잘 모르거나 알아도 제대로 그리고 정확히 알지 못하는 사람이 침묵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실은 잘 모른다는 것, 혹은 아예 모른다는 것을 상대방이 눈치챌까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그러니 주절이주절이 떠들 수 밖에 없습니다.

 

진리를 아는 사람의 침묵은 진리를 모르는 사람의 침묵과는 그 질이 다릅니다. 진리를 아는 사람의 침묵, 진리를 깨달은 사람의 침묵은 그냥 할 말이 없어서도 아니고 할 말이 부족해서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 참 진리를 잘 몰라서도 아니고 그 사람 안에 참 진리가 한참 부족해서도 아닙니다. 또한 상대방의 달변, 그 말 많고 말을 잘하는 것에 기가 눌려서 혹은 상대방의 권위와 권력에 눌려 어쩔 수 없어 밀려서 내 말을 못하는 억지의 침묵, 굴욕과 굴종, 패배의 침묵, 두려움과 무서움의 복종의 침묵이 아닙니다. 진리를 아는 사람의 침묵, 진리를 그 안에 담고 있는 사람의 침묵은, 무엇을 모르는 상대방 조차도 진리로 끌어안겠다는, 진리로 이끌겠다는, 더 나아가 말이 아닌 침묵이라는 더 큰 실천적 언어, 실천과 행동으로 이끄는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보여주고 들려주는 그래서 경험하는 더 큰 언어로 그 진리를 보여주고 들려주겠다는 선언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침묵은 살아있는 말, 언어입니다. 침묵은 단지 말 없음, 말 안함이 아니라 내가 깨닫고 알고 내가 담고 있는 그 진리를 내가 살아내는 것입니다.

더 이상 무지함을 지키는 너에게 무엇을 더 들려주고 보여주고 가르쳐주고 할 것도 없고, 할 시간도 없고, 할 일도 아니라는 깨달음에서 비롯된, 그래서 이제 내가 직접 그 진리를 너에게 나의 몸으로 나의 삶으로 보여주겠다,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는 결단 속에 택하는 것이 침묵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깨닫는 사람, 진리를 아는 사람, 그리고 진리가 그 안에 있는, 진리인 사람의 침묵은 진리를 살아내는 실재 행동이고 실천입니다.

 

그리고 침묵은 또한 상대방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생각하게 합니다. 도대체 이 침묵은 뭘까? 왜 이 사람은 침묵을 선택한 것일까? 지금 여기 예수 그리스도의 침묵은 빌라도를 비롯한 세속 권력, 세상 권력을 향한 질문입니다.

“너는 나를 왕으로 생각하느냐?” “너희는 진리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말은 공격의 수단이면서 방어의 수단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리이신 주님은 공격하고 방어하고 할 그 무엇이 없는 분이십니다. 바다가 모든 강물을 다 받아들이듯, 그 안에 모든 것을 품으십니다. 저들의 의심도 적의도 악의도 품으십니다. 지금 주님의 침묵은 넓고 깊고 푸른 바다, 진리와 생명의 바다입니다. 모든 것을 받아 품고 다시 살리는 바다입니다. 말은 더 이상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많은 것을 보여주셨고 들려주셨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제 그 모든 것을 품는 한 가지 일만 남았습니다.  

 

  1.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오?”

이 질문은 너는 유대인의 왕이 아니다, 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 질문입니다. 그래서 ‘네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라는 주님의 대답은, 정말 너는 나를 그렇게, 즉 유대인의 왕으로 생각하고 있느냐, 정말 그렇게 믿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너는 내가 기껏해야 유대인의 왕 정도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물론 그 조차도 되지 않는다고 이미 너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 그렇다면 너에게 왕은 도대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빌라도의 질문 속에서 쓰인, ‘당신이’라는 그 말에서 이미 빌라도가 주님을 왕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간파하신 주님이십니다. 사실 빌라도에게 나사렛 예수는 전혀 왕으로 보이질 않습니다. 왕이라고 하는데, 그 소유의 나라도 없고, 그 나라에 속한 백성도 없고, 그 나라와 백성을 그리고 무엇보다 그 왕을 지키고 보호할 군대도 없는 그런 왕이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빌라도에게 왕은 오직 저기 로마에 있는 황제 뿐입니다. 기껏 헤롯 정도가 작은 왕이면 왕이었지, 그것도 로마 황제의 지배하에 있는 피식민의 한낱 왕일 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작고 초라한 예수가 왕일 수 있을까, 그것이 빌라도의 생각입니다.

내 눈에 보이는 것, 내 손에 잡히는 것, 내 발이 닿는 것, 내 입에 가져갈 수 있는 것이 다인 세상에, 내 눈에 보이지도 않고, 내 손에 잡히지도 않고, 내 발이 가 닿을 수도 없고, 내 입에 무엇을 넣어주지도 않는 그런 왕, 그런 나라, 그런 왕이 다스리는 그런 나라의 그런 백성을 빌라도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권력, 하나님 세상, 하나님 백성, 하나님 나라, 그리고 하나님은 빌라도에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너는 정말 네가 왕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렇다면 그것을 나에게 증명을 해봐라”  

아마도 이것이 빌라도의 정말 속 질문이고 요구였을 것입니다. 네가 왕인지 나는 모르겠다, 믿을 수 없다, 그러니 정말 네가 왕이면 여기 내 앞에서 증명을 해봐라. 지금 주님은 광야에 홀로 서 계십니다. 그때 그 광야에서 사탄과 대적하셨던, 그 사탄의 유혹과 시험을 말씀으로 물리치셨던 그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침묵을 택하십니다. 그냥 침묵이 아니라 이제 행동을 통해 보여주겠다 하십니다. 내가 이제 지게 될 그 십자가, 그리고 무덤, 그리고 부활을 통해 너에게 보여주겠다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무덤, 그리고 부활이 빌라도를 비롯한 거기 모인 사람들 그리고 세상에 질문할 것입니다.

도대체 이 분은 누구신가? 정말 우리의 왕이신가? 정말 우리를 구원하시는 왕이신가? 예수 그리스도는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신가?

 

  1.  

그런데 여기, ‘네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하는 주님의 말씀은 처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이미 두 번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처음은 이것입니다.  

“20 저녁 때가 되어서,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아 계셨다. 21 그들이 먹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넘겨줄 것이다." 22 그들은 몹시 걱정이 되어, 저마다 "주님, 나는 아니지요?" 하고 말하기 시작하였다. 23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나와 함께 이 대접에 손을 담근 사람이, 나를 넘겨줄 것이다. 24 인자는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떠나가지만, 인자를 넘겨주는 그 사람은 화가 있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기에게 좋았을 것이다." 25 예수를 넘겨 줄 사람인 유다가 말하기를 "선생님, 나는 아니지요?" 하니, 예수께서 그에게 "네가 말하였다" 하고 대답하셨다.” (마태복음서 26:20-25)

유다 너는 알고 있지 않느냐, 누가 나를 넘겨줄 사람인지. 그런데 왜 그걸 나에게 묻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주님께 묻습니다. “주님, 왜 저의 삶이 이렇게 팍팍한가요? 왜 저의 믿음은 그리고 삶은 이렇게 흔들리는 걸까요? 왜 제 기도는 들어주시지 않으십니까? 왜 가만히 계십니까? 제가 잘못 판단하고 생각하고 결정하고 행동한 것인가요? 제가 잘못 알고 그런 것인가요? 저의 믿음이 엇나간 것일까요?”

그런데 때로는 아니 자주 깨닫지 않으신가요, 이 질문들의 답은 주님이 아니라 내가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사실은 그 답을 이미 나는 알고 있다는 것. 그래서 우리는 기도를 주님께 쏟아 내기는 잘 하는데, 주님 앞에 침묵을 잘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내 안에서 그 답이 이렇게 나올까 싶어서. 거울 앞에 선 나를 똑바로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이건 아닌데, 하면서 가고 있으면서, 그걸 인정하기 두렵고 무섭고, 혹시 그나마 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을까 불안해서 우리는 모른 척 하는 건 아닐까요?

“주님, 나는 아니지요? 주님, 내가 잘못한 건 아니지요? 주님, 내가 잘못 살고 있는 건 아니지요, 내가 잘못 믿고 있는 것은 아니지요? 주님, 내가 잘못 생각하고 판단하고 선택한 것은 아니지요?” 거기 가룟 유다 안에 우리 역시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것입니다.

“60 많은 사람이 나서서 거짓 증언을 하였으나, 쓸 만한 증거는 얻지 못하였다. 그런데 마침내 두 사람이 나서서 61 말하였다. "이 사람이 하나님의 성전을 허물고, 사흘 만에 세울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62 그러자,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말하였다. "이 사람들이 그대에게 불리하게 증언하는데도, 아무 답변도 하지 않소?" 63 그러나 예수께서는 잠자코 계셨다. 그래서 대제사장이 예수께 말하였다. "내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걸고 그대에게 명령하니, 우리에게 말해 주시오. 그대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요?" 64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당신이 말하였소. 그러나 내가 당신들에게 다시 말하오. 이제로부터 당신들은, 인자가 권능의 보좌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오." 65 그 때에 대제사장은 자기 옷을 찢고, 큰 소리로 말하였다. "그가 하나님을 모독하였소. 이제 우리에게 이 이상 증인이 무슨 필요가 있겠소? 보시오, 여러분은 방금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들었소. 66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하오?" 그러자 그들이 대답하였다. "그는 사형을 받아야 합니다." (마태복음서 26:60-66)

"내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걸고 그대에게 명령하니, 우리에게 말해 주시오. 그대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요?" 그런데 도대체 누가 누구에게 누구의 이름을 걸고 명령을 할까요? 누가 누구에게 질문을 해야 할까요? 누가 누구에게 대답을 해야 할까요? “당신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십니까? 그렇다면 여기 지금 내 소원을 들어주십시오, 내가 바라고 원하는 이것을 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당신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시며, 나의 구원자라는 것을 믿겠습니다.” 사실 거기 대제사장의 모습 속에 우리가 있는 건 아닐까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여기 이 두 구절, ‘네가 말하였다’ 혹은 ‘당신이 말하였소’의 그리스어 본문에서 주님은 모두 과거형으로 말씀하셨고, 오늘 읽은 구절, ‘당신이 그렇게 말하고 있소’ 에서는 주님이 현재형으로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성경 학자는 주님께서 이방인인 빌라도에게 그 나마의 작은 희망, 즉 빌라도가 이번을 계기로 옳은 판단, 옳은 믿음을 갖게 되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 아니 작은 기회를 주고 계신 것은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사실 동방 교회에서는 빌라도가 나중에 회심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고 또한 성인이 되었다고 여기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작은 희망 혹은 주어진 기회에 대한 그 성경 학자의 말이 또 다른 이방인 군인 지휘관의 고백을 통해 보면 그리 터무니 없는 것만으로는 보이진 않습니다.

 

“54 백부장과 그와 함께 예수를 지키는 사람들이, 지진과 여러 가지 일어난 일들을 보고, 몹시 두려워하여 말하기를 "참으로,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하였다.” (마태복음서 27:54)

최후까지도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는 주님,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과 기대와 소망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이십니다. 그걸 발로 차버리는 것이 한심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지금 그런 형편없는 사람들이 여기 총독 관저 안과 밖에 가득합니다.  

 

  1.  

“16 그런데 그 때에 예수 바라바라고 하는 소문난 죄수가 있었다. 17 무리가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여러분은, 내가 누구를 놓아주기를 바라오? 바라바 예수요?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요?" (마태복음서 27:16-17)

“여기 어떤 예수를 너희는 살릴 것이냐? 여기 어떤 예수를 너희의 지도자로, 왕으로 세우고 따를 것이냐?” 거기 모인 군중들에게만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여기 여러분과 저에게 묻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질문입니다.

 

확신이 없는 사람, 겁이 많은 사람, 불안이 많은 사람, 두려움이 많은 사람은 대게 말이 많습니다. 확신 없음, 겁 많음, 불안함, 두려움을 감추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남에게 의존합니다. 비겁한 사람 역시 말이 많고 남에게 의존합니다. 빌라도 역시 그렇습니다. 무엇을 명령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고 무엇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사람인데, 여기 군중들의 의견을 묻고 판단을 묻고 결정을 하게 하고, 또 그 결정과 명령에 따르고 있습니다. 비겁함입니다. 신앙은 이거냐 저거냐의 선택입니다. 친구 따라 강남은 갈 수 있어도, 친구 따라 하나님 나라에는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내가 믿고 내가 살고 내가 가야 합니다. 서로를 도울 수는 있어도 결국에는 내가 내 믿음을 챙겨야 합니다.    

지금 여기 두 명의 예수가 있습니다. 한 명은 바라바라고 하는 당시 로마제국에 대항했던 반란의 리더인 예수이고, 또 한 명은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한 명은 당시 민중들의 속을 뻥 뚫릴 정도로 시원하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로마제국에 대한 증오, 로마 편에 서 있는 정치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증오를 숨김 없이 드러내고 또한 그것을 행동으로 보여줍니다. 영웅입니다. 눈에 보이는 메시아입니다. 다른 한 명은 상대적으로 너무 힘이 없어 보이고 너무 나약해 보입니다. 고작해야 죄인들과 어울리고 거리 여인들과 병자들과 가난한 자들과 먹고 마시고 떠드는 사람입니다. 이런저런 기적을 꽤 보이기도 했지만 그러나 여전히 민중들이 보기엔 답답합니다. 기껏 왕으로 세우려고 하니 도망을 치니 비겁함도 보였습니다. 오신다 하는 다윗의 후손이라면 절대로 그런 모습을 보이진 않았을 텐데.

 

당시 민중들의 답답한 것을 뚫어주며 그 울분과 증오에 기댄 바라바라 하는 예수가 정말 메시아처럼 보입니다. 오른쪽 뺨을 때리면 왼쪽 뺨도 대라, 원수도 사랑하라는 그 나사렛 예수는 가짜 메시아처럼 보입니다. 우리를 부자로 만들어주고 높은 자리에 올려주겠다는 바라바라 하는 예수가 정말 구세주처럼 보입니다. 우리를 부자로 만들어주기는 커녕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고 슬퍼하고 아파하는 사람이 복이 있고, 오히려 내가 가지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라고, 서로의 필요를 채우라고 말하는 목수의 아들 예수는 가짜 구세주처럼 보입니다. 바라바라 하는 예수가 진짜로 보입니다.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가 가짜로 보입니다. 가짜 예수가 진짜로 보이고, 진짜 예수가 가짜로 보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예수를 선택할까요? 오늘 우리는 누가 진짜인지 알고 있으니 어려운 선택이 아니지만, 만약 우리가 그때 거기 있었다면 어떤 선택을 할까요? 그때 거기 모인 군중들과 지금 여기 우리는 많이 다를까요? 오늘날에는 그런 가짜 예수와 진짜 예수, 가짜 그리스도와 진짜 그리스도, 가짜 구세주와 진짜 구세주 중에서의 선택이 없을까요?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오늘은 어떻게 살까, 그럴 때 우리는 이미 그 선택 앞에 놓여 있습니다. 오늘 여기 빌라도가 연 재판이 이른 아침에 벌어졌다는 것은 그저 상징적인 의미만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1.  

“21 총독이 그들에게 물었다. "이 두 사람 가운데서, 누구를 놓아주기를 바라오?" 그들이 말하였다. "바라바요." 22 그 때에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그러면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는,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요?" 그들이 모두 말하였다.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23 빌라도가 말하였다. "정말 이 사람이 무슨 나쁜 일을 하였소?" 사람들이 더욱 큰 소리로 외쳤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마태복음서 27:21-23)

여기가 광야입니다. 장소가 아니라 사람이 광야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 찾으셨던 광야 거기, 사탄에게서 시험과 유혹을 받으셨던 거기만 광야가 아닙니다. 정말 광야는 사람입니다.

 

“1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2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3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니, 그가 없이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다. 창조된 것은 4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의 빛이었다. 5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 . . 9 참 빛이 있었다. 그 빛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다. 10 그는 세상에 계셨다.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11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요한복음서 1:8-11)

창조의 말씀, 생명의 빛이 세상에 와서 비추고 있는데, 아무도 그 빛을 보지 못합니다. 빛을 거부합니다. 그게 광야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곳, 물 한 방울도 찾아 볼 수 없는 곳, 흙먼지와 돌멩이가 구르는 곳만 광야가 아니라, 사람들이 바로 광야입니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그 마음이 광야이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를 부인하는 그 마음이 광야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거기 대제사장이나 군중들 모두 스스로를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떨까요? 우리 역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처럼 우리 역시 우리 마음 그 안에 주님이 계시지 않다면, 계셔도 희미한 그림자로만 계시다면, 우리 또한 주님께 광야입니다. 광야에 구르는 한 개의 돌멩이입니다. 가룟 유다, 대제사장, 빌라도 총독, 그리고 거기 어리석고 무지한 군중들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께는 광야입니다. 주님께 우리는 언제든 광야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광야일 수 있습니다. 서로에게 사랑이 없고 용서가 없고 자비가 없고 정의가 없다면 우리는 서로에게 광야일 뿐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천국일 수 있습니다. 장소가 아닌 사람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사람으로 오신 그리스도 예수십니다. 그리고 그 주님을 내 안에 모신다면, 그 주님을 믿고, 그 주님의 나라를 내가 산다면 우리는 그 하나님 나라 안에 있는 작은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1.  

“23 빌라도가 말하였다. "정말 이 사람이 무슨 나쁜 일을 하였소?" 사람들이 더욱 큰 소리로 외쳤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24 빌라도는, 자기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것과 또 민란이 일어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고 말하였다.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책임이 없으니, 여러분이 알아서 하시오." 25 그러자 온 백성이 대답하였다. "그 사람의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시오." (마태복음서 27:23-25)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책임이 없으니, 여러분이 알아서 하시오."

우리는 이토록 비겁합니다.

"그 사람의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시오."

우리는 이토록 무지하고 어리석습니다. 우리는 내가 지금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내가 지금 누구의 말을 듣고 있는 것인지, 내가 지금 어떤 판단을 내리고 있는 것인지, 내가 지금 어떤 길을 걷고 있는 것인지, 내가 지금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내가 지금 손에 넣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내가 지금 오르고자 하고 또 오르고 있는 그 곳이 과연 어떤 곳인지, 마치 우리가 다 알고나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또한 살아갑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는 잘 알까요?

 

말의 홍수 속에 살고 있는 우리입니다.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는 우리입니다. 들리는 것들, 보이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정말 너무 시끄럽습니다. UBC로 오는 99번 버스 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의 그 수를 세어보니 약 40여명 정도 였습니다. 거기 운전기사와 저, 그리고 한 명을 빼고는 죄다 헤드폰을 낀 채로 핸드폰을 보고 있었습니다. 내 귀에는 들리는 것이 없어 너무 조용하긴 한데 . . . 그런데 오히려 너무 시끄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들 귀에 들리는 음악 소리를 비롯한 통화 소리, 그리고 지금 보고 있는 핸드폰 속의 그 수 많은 영상들. 그게 너무 시끄러웠습니다. 말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말이 너무 많았습니다. 조용한데, 침묵인데, 그런데 오히려 너무 소란스럽고 요란했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이 버스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알까? 확신할까? 물론 99번을 탔으니 UBC 그 종점을 향해 갈 것이라는 믿음 속에 탔을 것이고, 그래서 거기 잘 도착할 것이다 안도감과 만족감과 편안함 속에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렇지 않다면, 만약 내가 버스를 잘못 탔다면, 만약 이 버스가 가다가 다른 길로 다른 곳으로 간다면 우리는 그걸 알아챌까? 너무 늦게 알게 되는 것은 아닐까? 어 . . . 여기가 아닌데, 이 길이 아닌데, . . . 그런데 돌이키기에, 내리기에 너무 늦는 것은 아닐까?

 

오늘 여기 주님은 침묵은 우리의 침묵을 요구합니다. 가만히 잠잠히 있어 주님을 보라, 주님의 음성을 들어보아라, 그리고 누가 주님이신지 알아라, 그것이 주님의 침묵의 의미가 아닐까요?

“주님을 팔아넘길 자가 나는 아니죠?” 

“그대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요?”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오?”

우리가 예수님께 물을 질문이 아닙니다. 내가 나에게 물어야 질문입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나에게 물으시는 질문입니다.  

“너는 나를 팔아넘길 작정이냐?” 

“너는 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정말 믿느냐?”

“너는 나를 너의 왕으로 알고 믿고 또한 따르고 있느냐?”

우리 모두 침묵이 필요합니다. 조용히 그리고 가만히 주님을, 그리고 그 많은 질문들을 내 안으로 받아 안을 때입니다. 바쁠수록 멈추고, 말을 하고 싶고, 말이 터져 나올 것 같을 그때 오히려 입을 멈추고 생각을 멈추고 손을 멈추고 침묵을 할 때입니다.  

 

“1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시며, 우리의 힘이시며, 어려운 고비마다 우리 곁에 계시는 구원자이시니, 2 땅이 흔들리고 산이 무너져 바다 속으로 빠져 들어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3 물이 소리를 내면서 거품을 내뿜고 산들이 노하여서 뒤흔들려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4 오, 강이여! 그대의 줄기들이 하나님의 성을 즐겁게 하며, 가장 높으신 분의 거룩한 처소를 즐겁게 하는구나. 5 하나님이 그 성 안에 계시니, 그 성이 흔들리지 않는다. 동틀녘에 하나님이 도와주신다. 6 민족들이 으르렁거리고 왕국들이 흔들리는데, 주님이 한 번 호령하시면 땅이 녹는다. 7 만군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야곱의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시다. 8 땅을 황무지로 만드신 주님의 놀라운 능력을 와서 보아라. 9 땅 끝까지 전쟁을 그치게 하시고, 활을 부러뜨리고 창을 꺾고 방패를 불사르신다. 10 너희는 잠깐 손을 멈추고, 내가 하나님인 줄 알아라. 내가 뭇 나라로부터 높임을 받는다. 내가 이 땅에서 높임을 받는다. 11 만군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야곱의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시다.” (시편 46)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했습니다. 나그네는 가던 길 멈추고 아예 거기 영 머물지 않습니다. 나그네는 침묵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스로 침묵을 택한 사람입니다. 침묵 속에서 소리를 듣습니다. 새의 지저귀는 소리를 듣고, 풀벌레 소리를 듣고, 풀잎에 스치는 바람 소리를 듣고, 시냇물 흐르는 소리도 듣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소리를 듣습니다. 이 길이 맞는지 묻고 또 묻습니다. 때로 멈추고 침묵합니다. 걸으면서도 침묵합니다. 바람 소리에 묻어오는 물냄새를 듣고 비를 피할 준비를 합니다. 그러다 나그네는 내 안에서 울려 나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문득 들려오는 그 길로 가면 안된다는 음성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지금 빌라도 앞에 서신 주님은 침묵 속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의 광야에 홀로 서 계신 예수님은 지금 아버지께 길을 묻고 계신지도 모릅니다. 그 길을 가르쳐 주시는 아버지의 음성을 듣고 계신지도 모릅니다. 그래야 힘을 내어 그 길을 마저 걸어가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침묵은 우리를 침묵으로 이끕니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으로 이끕니다. 주님 앞에, 하나님 앞에 우리의 침묵은 그 주님, 그 하나님의 음성, 그 사랑의 음성을 듣고 받아 내 안에 모시게 합니다. 침묵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그 하나님 앞에 침묵하는 것, 그리고 그 음성을 듣는 것, 그것이 기도이고 예배이고 신앙이고 신앙의 길이고 신앙의 삶입니다. 주님의 침묵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 주님 앞에 내가 침묵하시기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주님의 침묵은 곧 주님께서 행동하시겠다는 뜻입니다. 또한 우리의 침묵은 우리가 그 주님의 침묵에 함께 함으로 그 주님의 음성을 듣고 또한 주님의 그 행동에 우리가 함께 하겠다는 결단입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사도신경> 중에서)

그 ‘빌라도’가 우리입니다. 빌라도였던 우리, 빌라도인 우리, 언제든 빌라도가 될 수 있는 우리. 진리와 생명의 빛이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우리가 빌라도입니다. 이 핑계 저 핑계로 그 빛을 거부하고 부인하고 피하는 우리가 빌라도입니다. 당신이 정말 왕이십니까, 믿지 못하는 의심하는 우리가 빌라도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주님을 따를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하겠습니다, 미루는 비겁한 우리가 빌라도입니다. 내가 바라고 원하는 것을 준다면 그게 누구든 나의 왕으로 황제로 알겠다, 부와 성공과 명예를 약속만 한다면 누구든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 따르겠다 하는 우리가 빌라도입니다. 주님께 내가 언제든 광야로 있을 수 있는 약하고 악한 우리가 빌라도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침묵 속에서 말씀하십니다.

“빌라도인 너, 네가 지금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너에게 여전히 기회는 있으니, 앞으로는 어떻게 말하겠느냐? 이제 그만 너의 말을 멈추고, 그만 너의 욕심 많고 생각 많고 의심 많은 삶을 잠깐 멈추고, 나의 앞에 잠잠히 있어 네가 누군지, 그리고 내가 누군지 알아라.”  

우리는 때때로 침묵 속에 있어, 주님께 나의 약함과 악함을 고백하고, 나의 부족한 신앙을 고백하고, 또한 내 안에 여전히 숨어 있어 언제든 튀어나오려는 그 빌라도의 모습을 피하지 않고 바라보는 또 고백하고, 그래서 늘 주님께 깨어 있는 참 신앙을 살아가야 합니다. 빌라도가 나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나라는 것, 그것이 주님 앞에 침묵하는 겸손의 신앙이고, 그것이 주님께 꼭 붙어있을 수 있는 참 고백의 신앙입니다. 그런 신앙, 함께 지켜 가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