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립고 그래서 너무 보고 싶고 . . . 그랬더니 꿈에서 뵈었습니다, 오래 전 돌아가신 아버지.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나 봅니다. 18세기 조선시대에 살았던 연암 박지원의 시, <연암협에서 세상을 뜬 형님을 생각하며 燕巖億先兄>입니다.
형님의 모습이 누구와 닮았던가 我兄顔髮曾誰似
아버님 생각나면 형님을 뵈었었네. 每億先君看我兄
오늘 형님 보고파도 어데 가 만나볼까 今日思兄何處見
의관을 정제하고 시냇가로 나가본다. 自將巾袂映溪行
- 정민의 ‘한시 미학 산책’ 중에서
돌아가신 아버지가 보고싶을 때면 아버지를 꼭 빼 닮은 형님을 찾았습니다. 형님을 뵈면 아버지를 뵌 것처럼, 아버지와 못다한 정을 형님과 나누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 형님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 형님이 그립고 보고 싶은데 뵐 길이 없습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났습니다. 사람들이 자주 형님과 나를 혼동할 때가 있었습니다. 되었다 싶어 형님을 만나러 갑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보고싶어 형님을 찾을 때처럼 이번에도 옷을 제대로 갖추어 입고, 형님과 자주 찾던 그 시냇가로 갑니다. 그리고 물에 내 얼굴을 비춰봅니다. 시냇물에 비친 내 얼굴에서 형님 얼굴을 봅니다. 그런데, 형님의 얼굴만이 아닙니다. 거기 오래 전 돌아가신 그리운 내 아버지의 얼굴도 보입니다. 내 얼굴에 형님의 얼굴이, 그리고 아버지의 얼굴이 있습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공부하러 멀리 떠난 내 아이의 얼굴 또한 있습니다.
얼굴의 옛말은 얼꼴입니다. 얼의 꼴, 그리고 얼이 담긴 그릇, 꼴입니다. 내 얼굴에는 나의 처음 그 모습, 본래의 나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억지로 꾸미지 않은,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나, 그 원래의 나, 본래의 나, 나의 얼, 나의 영, 그 얼의 꼴, 형태, 모습. 우리의 맨 처음, 나의 본래, 근원, 뿌리(本). ‘나는 나다’ 하신, 나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의 그 얼굴, 그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의 본래의 얼꼴이고, 나의 얼굴입니다.
내 얼굴에 내 형님의 얼굴이 보이고, 다시 내 아버지의 얼굴이 보이고, 또 내 아버지의 아버지의 얼굴이 보이고. 그렇게 내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 . . 얼굴이 보이고. 그렇게 거슬러 올라가면 거기 가 닿은 그 끝, 그 맨 처음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의 얼굴이 있습니다. 그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형상을 따라, 그 선하신 뜻에 따라 우리 모두는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시냇물에 비춰진 내 얼굴, 내 형님의 얼굴, 그리고 내 아버지의 얼굴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선하신 얼굴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 시냇물에 비춰진 내 얼굴에서 내 형님의 얼굴 그리고 내 아버지의 얼굴을 찾아볼 수 없다면, 아버지 하나님의 그 선하신 얼굴이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위선입니다. 가짜입니다. 그리고 그 가짜 얼굴을 하고 있는 나는 위선자입니다. 지금 주님께서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꾸짖고 계신 이유입니다.
“2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다. 3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르지 말아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는 않는다. 4 그들은 지기 힘든 무거운 짐을 묶어서 남의 어깨에 지우지만, 자기들은 그 짐을 나르는 데에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5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다. 그들은 경문 곽을 크게 만들어서 차고 다니고, 옷술을 길게 늘어뜨린다. 6 그리고 잔치에서는 윗자리에,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며, 7 장터에서 인사 받기와, 사람들에게 랍비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 . 13 . . . 너희는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늘 나라의 문을 닫기 때문이다. 너희는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 . .” (마태복음서 23:2-7)
너 위선자들아! 도무지 너의 얼굴에 내 아버지 하나님의 얼굴, 그 선하신 얼굴을 찾아볼 수가 없구나. 네 얼굴에 사랑도 용서도 자비도 정의도 평화도 진실도 정직도 없고, 선하신 내 아버지 하나님의 얼굴은 찾아볼 수 없으니, 나에겐 너무도 낯선 너희 얼굴이니, 그런 너희를 나는 모른다, 너희가 누군지 나는 모른다.
- 참조, Narcissus, Caravaggio, 1597-98
한껏 정성들인 화장과 분장과 가면으로 꾸미고 치장하고 감춘 나에 감탄, 감격에 겨워 내 얼굴에 넋을 놓은 나르키소스(Narcissus). 진짜 내 얼굴은 이미 잊은 지 오래, 나의 본래의 얼굴, 내 얼굴에 새겨진 그 주님의 얼굴은 간데 없고. 주님을 닮은 아름다운 사람으로, 주님을 그리고 서로를 사랑으로 살아야 하는데. 나에게 아름다운 사람으로 나만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있는 나르키소스.
배우가 제아무리 화장과 분장을 기막히게 잘하고, 정말 같은 가면을 써서 관객을 감쪽같이 속일 수는 있어도, 무대 위 동료 배우까지 어떻게 속일 수는 있어도, 제아무리 척 해도 그 무대를 만들고 지휘하는 연출가와 감독은 누가 누군지 다 압니다. 하나님까지 속일 수는 없습니다.
“너희 위선자여, 너희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왜 이런 심한 말씀을 하실까요? 복의 말씀도 부족한 세상에, 굳이 화의 말씀을, 저주의 말씀을 하실까요?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주님이신데 . . .
- 참조, Not to be Reproduced, Rene Magritte, 1937
하나님은 물에 비치지 않은, 우리가 숨기고 감추고 싶었던 우리의 뒷모습을 다 보고 알고 계십니다. 위선(僞善)이 아닌, 작위(作爲)가 아닌, 원래 그대로의 자연(自然)의 얼굴, 본래의 얼굴을 주신 주님, 그 본래의 내 얼굴을 알고 계신 주님, 그리고 그 얼굴로 살기를 바라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로, 그리스도 예수의 형제자매로, 하나님의 자녀로, 아버지 하나님의 얼굴로 살아가는 우리, 그 우리의 얼굴을 보고싶어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화가 아닌 복의 자녀로 살기를 바라시는 주님이십니다.
‘너희에게 화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의 뜻이 아니고 계획이 아니고, 이 땅에 사람의 아들로 오신 이유가 아닙니다. 화가 아니라, 복을 주시려고, 우리가 화 아닌 복을 살게 하시려고,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 저와 여러분을 향한 아버지의 뜻이고 마음이고. 그러니 제발 화의 길로 가지 말아라, 복의 길을 두고 거기 힐끗거리지도 말아라, 그게 자식을 향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시고, 지금 그 아들 그리스도 예수께서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너무 안타까워, 그리고 여기 우리가 안타까워 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래서 협박과 저주의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말썽 많은 자식들, 도통 말을 듣질 않는 자식들, 질풍노도의 십대의 자식들에게, 그래 이렇게 말해야 오히려 너희 귀에 쏙쏙 들어가지 않을까 싶어 하시는 말씀입니다.
“3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 . 4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 . 5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 .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 . 7 자비한 사람은 복이 있다. . . 8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 . 9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 .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 . 11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 12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너희보다 먼저 온 예언자들도 이와 같이 박해를 받았다." (마태복음서 5:3-12)
이렇게 말해야 듣는 자식도 있지만, ‘어, 이건 내 얘기가 아닌데’ 하며 듣는 척도 않는 자식들, 벌써 저만치 가 있는 자식들, 나 다 안다 나 다 잘 하고 있다 하는 그 잘난 자식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런 삐딱한 자식들에겐 마태복음 5장의 그 산상설교, 그 팔복의 말씀보다 오히려 더 강렬한 복의 말씀입니다. 이러이러하면 복이 있다, 하면 흘려 들을까 싶어, 그래 그럼 너희가 이러이러하면 화가 있다, 큰 일이 날 것이다, 하면 조금은 더 새겨 들을까 싶어 하시는 사랑의 주님의 말씀입니다. 더 늦기 전에 제발 이것 만큼은 새겨들어라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이웃을 사랑한다, 말만 많고 하는 척만 하진 말고, 꾸밀 생각 말고, 덮을 맘 품지 말고, 속이고 감추지 말고. 그만 나에게 너에게 서로에게 솔직해라. 모르면 모른다, 잘못했으면 잘못했다, 난 아직 멀었다, 난 아직 잘 모른다, 난 아직 잘 못한다, 그렇게 아버지 하나님께 맨 얼굴로 나와라, 맨 몸으로 나에게 와라, 여기 맑은 시냇가로 오라, 투명한 거울 앞에 서라, 너를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비춰봐라, 지금 주님의 말씀입니다.
나를 비추는 맑고 투명한 시냇가, 그 거울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살아계신 말씀이신 그리스도 예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오시어 우리 가운데 계신 성령. 그리고 그 성령께서 세우신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또한 그 주님의 몸으로 모인 여러분과 저, 우리 서로가 바로 그 비출 시냇물이고 거울입니다. 서로를 비춰,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보여주는 시냇물이고 거울입니다.
누구의 자식인 내가, 누구의 형제인 내가, 거짓이 없이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시냇물, 그 거울에 나를 비추니, 그대로 드러나는 천연의 나, 자연의 나. ‘나는 나다’ 하신 그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나와 우리’여야 하는데. 그 아버지의 얼굴을 닮은 ‘나와 우리’여야 하는데. 그런데 내가 거기에 무엇을 더하려 하거나 무엇을 빼려고 하거나, 무엇을 바꾸려고 하거나 무엇을 조작하려고 하거나, 무엇을 숨기려고 하거나 무엇을 지우려고 한다면, 그건 자연스러운 나, ‘참 나’가 아닌 부자연스러운 나, 그래서 작위 (作爲)의 나, 무엇을 꾸미고 만들고 세운 나, 즉 ‘거짓 나’가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위선(僞善)이고 위선자입니다.
그 옛날 우리를 비추었던 그 거울, 그 시냇물이 하나님의 말씀, 모세를 통해 주셨던 율법입니다. 거기 나와 우리를 비춰보고, 우리가 잘 가고 있는지, 우리가 잘 살고 있는지, 우리가 제대로 믿고 있는지, 제대로 믿음의 삶을 살고 있는지 알고 깨닫고 고치고 서로를 격려하고 조언하는, 그래서 율법은 걷고 살아야 할 법, 물이 흐르는 길을 가르치고 보여주고 인도하는 법입니다. 그 율법은 우리의 얼굴이 제대로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얼굴을 비추고 있는지 점검하고 확인하는 거울로서, 우리가 정말 누구인지, 우리가 정말 어떤 마음을 품고,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곳을 향해서 누구를 의지하고 가야 하는지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그런데, 갈수록 그 율법이 주인이 되어버려, 나와 너와 우리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잣대로 쓰이고, 나는 무엇을 잘 했고 너는 무엇을 못했고, 나는 의인이고 너는 죄인이고, 그 판단을 내리는 심판관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 맨 처음 거기 그 얼굴, 거울에 비춰진 그 얼굴이 아닌 원본, 그리스도 예수, 창조의 말씀이 오셨습니다. 지금 사람들 앞에 서 계십니다. 그런데, 너무 답답하고 갑갑하게도 지금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또 다른 거울 앞에 서 있는 양, 주님 앞에서 멋부리며 거짓으로 서 있습니다. 나는 이것을 했고 저것을 지켰고, 온갖 자랑으로 서 있습니다. 높은 자리에 앉으려 애쓰고, 내가 잘한 것, 누가 잘하지 못한 것, 그래서 나는 의인이고 저들은 죄인이고. 결국 나의 의로움이 앞서 있는 저들이니, 가난하고 소외되고 병들고 이방인으로 죄인으로 사는 이들에 대한 정죄만 있고. 용서도 자비도 사랑도 정의도 평화도 진실도 없습니다. 여기 주님은 이제 그것 내려놓고, 하나님의 아들인 내 앞으로 와라. 그런 것 말고 네 자신, 너의 맨 얼굴, 벌거벗은 네 자신 그대로 나에게 너희를 비춰보아라, 너희가 정말 누가여야 하는지, 그런데 얼마나 망가졌는지, 일그러졌는지, 그걸 맨 눈으로 보아라 하십니다. 주님께 던졌던 그 많은 질문은 이제 그만 내려놓고, 나의 질문에 답을 해라. ‘너희는 하나님의 것으로 살고 있느냐’, ‘너희의 얼굴은 하나님의 얼굴을 하고 있느냐’, ‘너희는 서로에게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느냐’, 내 질문에 답을 하라 하십니다.
이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려라, 그런데 거울에 비춰진 너희의 얼굴이 황제처럼 보이니, 그것이 위선자라는 것입니다. 무얼 어떻게 했길래, 도대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길래, 너희의 얼굴이 그 모양이 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니 어디에 마음을 두고 살았길래, 어디서 어떻게 살았길래, 그리고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길이길래, 얼굴이 그리 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흐르는 시냇물이 잘못된 것이냐, 그 비춘 거울이 잘못된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게서 그리고 모세를 통해 그리고 수많은 선지자들을 통해 들은 대로,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모세에게, 그리고 다윗에게, 그리고 너희 조상에게 한 것을 본 대로, 배운 대로, 그리고 너희가 믿는 대로 전하고 또 살고 하면 되는 것을. 너희 얼굴을 보면 내 얼굴이 보이고, 내 얼굴을 보면 너희 얼굴이 보이고. 그렇게 아버지와 아들과 딸로 살자 했는데. 왜 너희 얼굴에 내가 보이질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왜 너희 얼굴에서 나를 보려고 하지 않느냐, 왜 서로에게서 나를 보려고 하지 않느냐, 왜 나를 보지 못하느냐, 결국 눈이 멀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높은 자리에 앉고 율법을 논하고, 누구를 죄인이다 의인이다 하고, 나는 잘 하고 있다 하니, 결국 눈이 먼 너희가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위선을 넘어 위험으로 치닫는 너희라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지 않고, 따라 거짓으로 선을 행하는 것. 말과 행동이 다른 것, 믿음과 삶이 다른 것이 위선입니다. 성전을 열심히 드나들고, 성전 제사에 열심이고, 성전에 제물을 드리고 헌금을 드리고 십일조를 드리고. 철을 따라 때를 따라 이런 저런 일도 하고 제물도 드리고. 이런저런 율법도 규칙도 지키고. 그런데, 왜 너희 얼굴에 내가 없느냐, 그것이 위선입니다. 너희 얼굴이 황제를 닮아가고, 너희 얼굴이 바알 신을 닮아가고, 제우스 신을 닮아가고, 풍요의 여신 아프로디테를 닮아가고, 로마의 시저와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을 닮아가고, 이집트의 파라오를 닮아가는 것이 위선입니다. 게다가 너희는 다른 사람들도 그 길로 인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먼 인도자로 성령의 일을 막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나에게로 오는 길을 막는 걸림돌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너희를 아버지 하나님께로 인도할 목자로, 하나님 나라로 가야 할 길로 주(主), 그리스도 예수가 왔는데. 너희가 너희의 얼굴을 비춰보고, 그래서 너희가 회복해야 할 얼굴로 왔는데. 왜 너희는 그 시냇물이며 거울인 너희의 주인 나에게 너희 얼굴을 비출 생각도 않고, 오히려 눈을 질끈 감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그 거울을 깨려고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희는 앞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도 모른 채, 오히려 남들 앞에 서서, 높은 곳에 서서, 남들을 인도하는 눈먼 인도자일 뿐이다, 그런 너희가 어떻게 나의 양들을 아버지께로 인도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토론토에서 있었던 vision ministry conference에서 대학생 및 청년 사역의 리더들의 패널 토론이 있었습니다. 여기 모인 목사들과 교회 리더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지, 사회자가 물었습니다. 그들의 대답은 대략 이것이었습니다.
교회와 교회 리더들은 제자도, 제자훈련에 대해 말만 하지 말고, 그저 가르치려고만 하지 말고, 실제로 그 모범을 보여달라. 당신들의 집과 일터로 우리를 초대해서 제자가 된다는 것, 제자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달라. 당신이 아내를 어떻게 대하는지, 남편을 어떻게 대하는지, 자녀를 어떻게 키우는지. 당신이 학교에서 직장에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어떤 관계를 맺으며 어떤 모습으로 일하고 있는지. 이제 당신들의 삶으로 우리에게 그걸 보여달라.
- 참조, The Blind Leading the Blind, Pieter Bruegel the Elder, 1568
위선자, 눈먼 인도자가 아닌, 주님을 본 대로, 주님을 경험한 대로, 주님의 말씀을 들은 대로 배운 대로, 그리고 주님을 믿는 대로 사는 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면 된다. 그러면 우리 또한 그렇게 보고 듣고 배운 대로 살겠다 하는 것입니다. 아픈 말입니다. 지금 여기 예수께서 하신 말씀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앞에 서서 인도하는 사람들, 그들만 정신을 차리고 그들만 눈을 떠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뒤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 다 정신을 차리고 또 눈을 떠야 합니다. 그래야 혹시나 앞에 선 사람들이 잘못된 길로, 엄한 곳으로 이끌고 가면 바로 알아 차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꾸짖고 길을 바로 잡아 함께 옳은 길로 가야 합니다. 우리 모두 싫든 좋든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누군가를 인도하는 사람들입니다. 누군가의 엄마이고 아빠이고, 할머니고 할아버지고, 누나이고 언니이고 오빠이고 형이고. 누군가의 남편이고 아내이고. 누군가의 직장 상사이고 학교 선배이고. 그리고 우리는 사람들을 주님께, 그리고 하나님 나라로 이끌어 주어야 할, 인도해야 할 인도자입니다. 그런 우리가 눈이 멀었다면 그게 큰 일입니다.
“9 참 빛이 있었다. 그 빛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다. 10 그는 세상에 계셨다.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11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12 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요한복음서 1:9-12)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주님을 맞아들인다 하는 것, 그 빛을 내가 받는다는 것, 그리고 그 받은 빛을 담고 있다가, 빛이 없는 곳에서 그 빛을 내는 것을 말합니다. 야광 테이프라는 것이 있습니다. 빛을 받아 안고 있다가 어두워지면 비로소 빛을 내는 테이프입니다. 공연장에서 쓰입니다. 어둠 속에서도 무대의 중심이 어디인지, 스태프들이 의자와 탁자를 가져다 놓을 자리가 어디인지, 배우가 등장해서 서 있을 곳이 어디이고 어디로 퇴장해야 하는지를 어둠 속에서도 알려줍니다. 그 테이프는 밝을 때 빛을 받아 담고 있다가, 어두울 때 비로소 빛을 냅니다. 그 테이프를 통해 배우들은 어둠 속에서도 헤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둠 속에서도 자기의 역할을 잘 해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밝을 때 그저 환하게 보이는 형광팬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길을 보여주는 야광 테이프와 같은 존재여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에게 그런 빛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의 빛을 받아 안아야 합니다. 그래야 어둠 속에서 빛을 내는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 앞에, 그 맑고 투명한 시냇물과 거울 앞에 서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부족하고 부끄럽지만 그러나 매일 그 주님 앞에 서서 나의 맨 얼굴로 주님을 만나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나의 얼굴이 조금씩 주님을 닮아가는 것, 주님을 살아가는 것. 그래서 나의 얼굴에서 형제자매의 얼굴을 보고, 부모의 얼굴을 보고, 서로의 얼굴과 이웃을 얼굴을 보고, 나아가 주님의 얼굴 그리고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삶입니다.
내가 주님께 받은 대로, 내가 주님께 들은 대로, 내가 주님을 본 대로, 내가 주님을 경험한 대로 내가 주님을 믿은 대로 살아간다면. 그래서 남들이 내 얼굴에서 주님의 얼굴을 본다면, 우리 서로가 서로의 얼굴에서 주님의 얼굴을 본다면. 내 얼굴에서 내 형제자매의 얼굴을 본다면, 내 형제자매의 얼굴에서 내 아버지 어머니의 얼굴을 본다면. 지금 내 옆에 앉아있는 내 교인, 내 친구, 내 이웃, 그리고 남 모르는 그 사람의 얼굴에서 내 얼굴을 본다면, 그리고 그 모든 얼굴에서 주님의 얼굴을 본다면, 우리는 서로를 함부로 할 수 없을 것이고, 서로에게 순종할 수 밖에 없을 것이고, 서로를 섬길 수 밖에 없을 것이고, 서로를 용서할 수 밖에 없을 것이고, 서로에게 안길 수 밖에 없을 것이고, 그래서 서로를 사랑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말씀 속에서, 찬양과 경배 속에서, 기도 속에서, 성도의 교제 속에서 내가 주님의 얼굴을 본 대로, 주님의 음성을 들은 대로, 주님의 말씀을 배운 대로, 그래서 내가 주님을 아는 대로, 내가 주님을 믿는 대로 살아간다면. 그래서 거짓이 아니고 위선이 아닌 진짜로 내가 있어, 진리와 생명이신 주님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누구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이 아니라, 서로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는 징검다리, 징검돌이 될 것입니다.
위선. 그건 내가 들은 대로, 본 대로, 배운 대로, 경험한 대로, 말씀 대로 살지 않는 것, 믿는 대로 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인 나의 삶에 사랑이 없고 용서가 없고 정의가 없고 진실이 없고 정직이 없고 평화가 없다면 그것이 위선입니다. 가짜입니다.
오늘 말씀처럼, 내 잔과 접시에 파리 몇 마리 떨어진 것, 그거 먹는다 큰 탈이 나지 않습니다. 문제는 눈을 감은 채로 내가 철 없는 낙타 등에 올라 있고, 날뛰는 말 위에 타고 있는 것이 문제고, 그것에서 내려 이번엔 그것들을 삼키는 것이 문제입니다. 내 눈을 먼저 떠야 합니다.
“29 그들이 여리고를 떠날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따라왔다. 30 그런데 눈 먼 사람 둘이 길 가에 앉아 있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큰 소리로 외쳤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31 무리가 조용히 하라고 꾸짖었으나, 그들은 더욱 큰 소리로 외쳤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32 예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들을 불러서 말씀하셨다. "너희 소원이 무엇이냐?" 33 그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눈을 뜨는 것입니다." 34 예수께서 가엽게 여기시고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니, 그들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들은 예수를 따라갔다.” (마태복음서 20:29-34)
“네 소원이 무엇이냐?”
주님께서 나에게 물어보시는데, 난 주님께 뭘 달라 할까, 멈칫 하지 말아야 합니다. 괜한 다른 생각은 말아야 합니다. 이 참에 이걸 달랠까 저걸 달랠까 . . . 로또 당첨되면 무엇부터 살까 . . . 로또 당첨된 듯 무얼 살까 흥분 속에 뭘 고를까 망설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호리병 속에 갓 나온 그런 램프의 요정이 아니십니다. 다른 것 다 잊고, 그냥 이것 하나 구하십시오.
“주님, 눈을 뜨고 싶습니다. 내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 주님을 보고 싶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주님의 얼굴을 보고 싶습니다. 내 얼굴에서 내 아이의 얼굴에서 내 부모의 얼굴에서 내 형제자매의 얼굴에서 그리고 내 이웃의 얼굴에서 그리고 세상 만물 거기 어린 주님의 얼굴을 보고 싶습니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주님.”
눈먼 자식에게 내 아빠의 얼굴, 내 엄마의 얼굴을 내 눈으로 한 번 보는 것. 그것 말고 눈먼 자식이 보고 싶은 것이 도대체 또 뭐가 있을까요? 앞을 보지 못하는 엄마 아빠가, 평생 내 눈으로 그 얼굴 보지 못했던 내 자식의 얼굴, 내 눈을 떠 그 자식 얼굴 한 번 보는 것, 그것 말고 무슨 소원이 더 있을까요? 그것이면 다 됩니다. 눈만 뜨면 그 다음은 아빠 엄마가 다 알아서 할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하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매일 거울 앞에 서는 믿음입니다. 차마 부끄럽고 송구스러워도, 이제껏 나 제대로 한 것 없고 제대로 드린 것 없어도, 본 대로 들은 대로 고백한 대로 믿은 대로 살지 못한 것 너무 미안하고, 그래서 너무 부족한 나이지만. 그러나 그래도 매일 아버지 하나님 앞에 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나에게 너무 실망스럽고 속상하고, 남들이 너무 싫고 화도 나고 해도, 그러나 매일 말씀으로 기도로 주님 앞에 서야 합니다. 때로 너무 힘들어 얼굴이 눈물 콧물 범벅으로, 때로 원망과 절망으로 얼굴이 화끈거려 아파도, 그래도 주님 앞에 있어 내 얼굴 돌리지 않고 똑바로 보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본 대로 들은 대로 믿은 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거울 속에서 조금씩 우리는 내 얼굴에서 나를 보시는 주님의 얼굴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보고 웃으시는 것을 볼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미 우리를 그렇게 보고 계십니다. 우리 눈이 아직 흐려 보지 못할 뿐입니다. 내 얼굴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믿음. 그 믿음을 살아가시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