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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 있어라

 

  1.  

추운 밤, 독서실 밖 10대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습니다. 독서실 안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수학책과 영어책을 펼쳐 놓고는 있지만 눈과 귀는 창밖 너머에 있습니다. 이 시간이면 꿈나라였을 아이들도 라디오에 귀를 쫑긋, 눈은 초롱초롱 빛나고 있습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오늘 밤, 첫눈이 온다는 일기예보 때문입니다. 여기 첫눈을 기다리는 아이들. 그런데 이 아이들이 첫눈을 기다리는 이유는 단지 이번 겨울 들어 처음 내리는 눈이라서 그걸 기념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 나이에 첫눈이 온다고 해서 딱히 갈 데가 있거나, 딱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기어코 첫눈을 맞겠다 눈 부릅뜬 채, 추운 날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밖을 서성거리는 이유는 뭘까요?

 

사람들은 왜 첫눈이 오면

만나자고 약속을 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왜 첫눈이 오면

그렇게들 기뻐하는 것일까

 

왜 첫눈이 오는 날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하는 것일까

아마 그건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첫눈이 오기를 기다리기 때문일 것이다

 

첫눈과 같은 세상이

두 사람 사이에 늘 도래하기를

희망하기 때문일 것이다

 

. . .

 

- 정호승의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중에서

 

첫눈을 기다리는 이유. 그것은 따뜻한 집 안에 있는 나를 추운 집 밖으로 불러내서 오히려 더 나를 춥게 만드는 그 차가운 눈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지금 이 추위를 녹여줄 사랑이 오기 때문이고, 그 사랑의 사람이 오기 때문입니다. 그 나에게 사랑의 기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그 사랑을 하고 있기 때문이고,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그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이루어지고, 우리의 사랑이 꽃을 피고, 우리의 사랑이 열매를 맺고, 그래서 우리의 사랑으로 온 세상이 덮이는, 첫눈과 같은 세상을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시간까지는 모릅니다. 그 첫눈이 오는 날은 일기예보를 통해 어찌어찌 알았지만, 그 시간까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각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 (마태복음서 24:36)

 

우리 몫이 아닙니다. 우리 몫은 첫눈이 올 것이라는 그 일기예보를 놓치지 않는 것이고, 그래서 내가 그 날을 준비하며 그 날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첫눈 예보는 있었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 정확한 시간까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추운 날씨에 일찌감치 나섰다가 첫눈은 고사하고 겨울비로 호된 감기에 걸려 고생하기도 합니다.  

 

  1.  

“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걸어가시는데, 제자들이 다가와서, 성전 건물을 그에게 가리켜 보였다. 2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 모든 것을 보고 있지 않느냐?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 3 예수께서 올리브 산에 앉아 계실 때에, 제자들이 따로 그에게 다가와서 말하였다. "이런 일들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선생님께서 다시 오시는 때와 세상 끝 날에는 어떤 징조가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마태복음서 24:1-3)

 

주님, 여기 이 화려하고 웅장한 성전 건물이, 말씀하신 대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무너지고 폐허가 되는 그 때는 언제입니까? 그리고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때에 그리고 세상 끝 날에 어떤 징조가 있겠습니까?”  

영원할 것처럼 보이는 예루살렘 성과 성전 건물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손으로 세우고 지은 것에는 끝이 있습니다. 영원히 누릴 것 같은 이 땅에서의 성공과 부귀와 영화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이루었다 성취했다 하는 것에는 끝이 있습니다. 영원히 죽지 않을 것같이 살아가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유한한 존재인 사람인 우리에게는 끝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세상의 끝을 지금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럼 그 때가 언제입니까?”

사실 우리 역시 알고 싶습니다. 오늘 밤에 첫눈이 올 것이라는 그 일기예보에 정확한 시간이 없어 도대체 친구와 혹은 사랑하는 사람과 약속 시간을 언제로 잡아야 할지 알 수 없고. 밤새 뜬 눈으로 지새고, 눈 빠지게 눈을 기다리며 하늘만 쳐다보며 거리를 배회하는 우리입니다. 그나마 그건 하룻밤이라 쳐도, 도무지 그 때가 언제인지, 그 날과 그 시각이 언제인지 알아야 미리미리 준비를 하고 대비도 할 텐데.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각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 (마태복음서 24:36)

우리는 알 수 없다는 것,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같은 조건이고, 인간의 한계입니다. 늘 아버지의 뜻을 묻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고 따르셨던 겸손하신 아들 예수께서 세상 끝 날이 언제인지 그것 또한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 하시니. 그러나 확실한 것은 우리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건 우리는 알 필요가 없다는, 모르는 것이 오히려 우리에게 좋을 것이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내가 죽는 날을 지금 알면 그게 나에게 과연 좋을까요? 과연 나는 그때까지 제대로, 잘 살아갈 수 있을까요?

 

  1.  

나라와 나라가, 민족과 민족이 서로 싸우고. 지진도 홍수도 나고. 기근과 전염병이 생기고. 온갖 불법과 불의가 판을 치고. 세상 여기저기 아프지 않은 곳이 없고 상하지 않은 곳이 없고. 성전 안에 로마의 제단을 비롯한 가증한 것들이 세워지고. 이것이 세상의 멸망이 아니면 도대체 뭘까 싶은 징조들이 나타나고. 여기서 저기서 내가 그리스도다 하고, 여기에 그리스도가 있다, 저기에 그리스도가 있다, 온통 거짓 예언자와 거짓 그리스도가 등장하고. (마태복음서 24:4-26)

이렇게 예루살렘이 멸망과 성전 파괴에 대한 징조는, 세상 멸망의 징조는 너무 요란하고 그래서 또한 확실한데. 종말이 가까웠나 보다 싶은데. 그런데 정작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그 끝 날은 종말의 때는 의외로 조용하고, 너무 평범하고 오히려 정상처럼 보입니다.

 

“36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각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 37 노아의 때와 같이, 이 인자가 올 때에도 그러할 것이다. 38 홍수 이전 시대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며 지냈다. 39 홍수가 나서 그들을 모두 휩쓸어 가기까지, 그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였다. 인자가 올 때에도 그러할 것이다. 40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을 터이나,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41 두 여자가 맷돌을 갈고 있을 터이나,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마태복음서 24:36-41)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밭에 나가 일을 하고, 맷돌을 갈고. 너무도 정상적이고 평범한 일상입니다. 누가 보아도 종말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끝 날, 바로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때는 그렇게 찾아 올 것이다 하십니다. 정말 종말처럼 보이는 그때가 아니라, 종말처럼 보이지 않는 때, 특히 나에게 종말로 보이지 않는, 나에게는 종말이 없는 듯 보이는 그때, 주님이 찾아오실 것이라는 것이다.

“42 그러므로 깨어 있어라. 너희는 너희 주님께서 어느 날에 오실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 . 44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는 시각에 인자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서 24:42, 44)

 

  1.  

지금 여러분께서는 주님을 기다리십니까?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인으로서 당연한 것 아니냐 해서 주님을 기다리십니까? 아니면 정말 진심으로 주님을 기다리십니까? 주님께서 당장 오시길 바라십니까? 당장이 아니면, 내일? 내일은 조금 이르니, 다음 주말정도? 요즘은 그럭저럭 지내기 괜찮으니, 내가 정말 힘들어질 그때 오시면 좋겠다 하십니까? 그런데 막상 그때가 되면 그럭저럭 살만해질 것이고, 아니 오히려 더할 나위없이 좋다면, 그래도 주님께서 오시길 우리는 바랄까요? 주님, 혹시 나중에 다시 오시면 안될까요? 그러지 마시고 아예 저에게 주님 연락처를 주시면 제가 나중에 연락을 드리면 안될까요?

너무 일찍 내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였다고, 지금 그 손톱의 봉숭아물이 사라져가고 있다고, 그러면 첫눈이 올때까지 갈 수 없다고, 그러면 내 첫사랑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그러나 거기 맞춰 하늘에서 첫눈이 올 리 만무합니다. 첫눈은 기다리는 것이지, 첫눈을 향해 내가 달려갈 수는 없고, 그 첫눈 먼저 오고 나중에 겨울 오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또한 첫눈을 내 맘대로 내가 미룰 수도 없습니다. 첫눈은 하늘에서 나에게로, 하늘에서 이 땅으로 내려오는 것이지, 내가 그 첫눈 먼저 맞겠다 올라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각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 (마태복음서 24:36)

 

  1.  

그런데 여기 하인과 다섯 처녀들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48 그러나 그가 나쁜 종이어서, 마음 속으로 생각하기를, '주인이 늦게 오시는구나' 하면서, 49 동료들을 때리고, 술친구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면, 50 생각하지도 않은 날에, 뜻밖의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51 그 종을 처벌하고, 위선자들이 받을 벌을 내릴 것이다.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일이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서 24:48-51)

 

주인이 나를 믿고 나에게 이 집을 맡겼는데, 집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모든 일들을 나에게 맡기고 떠나셨는데. 주인은 늦을 것이다, 내 생각과 뜻이 넘쳐 주인의 생각과 뜻은 도무지 안중에도 없고. 도대체 누가 주인이고 누가 종인지. 누가 명령하는 사람이고 누가 따르는 사람인지. 내가 없는 사이 내 사람들을 잘 돌보고 잘 섬기고 잘 꾸려라 나를 믿은 주인의 그 당부와 명령은 온데간데 없습니다. 주인은 아주 오랫동안 집에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내 멋대로 생각하고 그래서 내 멋대로 행동하는 종입니다. 그리고 동료들을 때리고 술친구들과 어울려 술에 취해 있습니다. 그래 주인이 돌아올 때 그때 잘 하면 되지, 미리 그럴 것 있나. 주인이 내 앞에 있을 때와 없을 때가 너무 다른 종, 위선의 신앙을 하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7 그 때에 그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서, 제 등불을 손질하였다. 8 미련한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말하기를 '우리 등불이 꺼져 가니, 너희의 기름을 좀 나누어 다오' 하였다. 9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이 대답을 하였다. '그렇게 하면, 우리에게나 너희에게나 다 모자랄 터이니, 안 된다. 차라리 기름 장수들에게 가서, 사서 써라.' 10 미련한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11 그 뒤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님,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애원하였다.” (마태복음서 25:7-11)

 

이 정도면 충분하다, 나 정도면 충분하다, 내 믿음이면 충분하다, 이 정도 믿음 생활이면 충분하다, 신랑이 오기 전에, 결혼식 시작 전에 왔고, 옷도 제대로 갖춰 입었고, 등잔도 들고 왔고, 등잔의 기름도 이 정도면 충분하고. 가만히 기다리면 되지, 따로 뭘 준비하고 말고 할 것이 있을까. 만약 부족하면 그건 그때 가서 하면 될 것이고, 물론 그럴 일은 없을 것이고. 속 편하게 믿고, 맘 편하게 믿음 생활을 했던 처녀들. 그러나 자기들 생각보다 기대보다 신랑이 늦게 오자 등잔의 불은 꺼져갑니다. 그러나 여분의 기름도 없습니다. 호떡집에 불이 난 듯 이리 달리고 저리 달리다 결혼식이 열리는 그 집의 문이 닫혔습니다.  

그 어리석은 종과 어리석은 처녀들에게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21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할 것이다.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분명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 (마태복음서 7:21-23)

 

그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가르치고, 예언도 하고, 귀신도 쫓아내고, 심지어 주님처럼 기적도 많이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 주님은 그들을 모르신다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이것입니다.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짠 맛을 되찾게 하겠느냐? 짠 맛을 잃은 소금은 아무데도 쓸 데가 없으므로, 바깥에 내버려서 사람들이 짓밟을 뿐이다.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세운 마을은 숨길 수 없다. 15 또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다 내려놓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다 놓아둔다. 그래야 등불이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환히 비친다. 16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 (마태복음서 5:13-16)

 

소금이 계속 그 짠맛을 계속 유지하는 것, 등불이 계속 그 빛을 내는 것, 사실 어렵습니다. 그래서 소금이 그 짠맛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습도와 온도를 유지해야 하고, 등불은 그 빛을 계속 내기 위해 여분의 기름을 계속 준비하고 또한 공급해야 합니다. 소금과 빛, 주님을 믿는 믿음을 통해 주님의 은혜 속에 우리가 받은 우리의 새 정체성입니다. 그러나 그 새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은 단지 주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주님께 기도하고, 주님을 예배하고 찬양하고 하는 것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나의 믿음이 밖으로 드러나는 나의 신앙 생활이 바로 라는 소금의 짠맛을 계속 유지하게 하는 습도와 온도이고, 주님을 살아내는 나의 신앙하는 라는 등불이 계속 빛을 내게 만드는 여분의 기름입니다.

 

  1.  

“45 누가 신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 주인이 그에게 자기 집 하인들을 통솔하게 하고, 제 때에 양식을 내주라고 맡겼으면, 그는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46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하고 있는 그 종은 복이 있다.” (마태복음서 24:45-46)

 

주인 집 하인들을 먹이고 입히고 돌보고 섬기는 일, 그것이 주인이 종에게 맡긴 일입니다. 예수께서 당신의 양떼를 제자들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내가 다시 올때까지 내 양들을 먹이고 입히고 돌보고 섬겨라, 그것이 예수께서 우리 모두에게 맡기신 일입니다. 그런데 그 종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11 그 뒤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님,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애원하였다. 12 그러나 신랑이 대답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였다. 13 그러므로 깨어 있어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각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서 25:11-13)

 

사실 여기 열 명의 처녀 모두 깨어 있지 않았습니다. 모두 잠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다섯명은 나는 부족하다, 지금 내가 갖고 있는 이 기름으로는 부족하다, 그걸 알았고, 그래서 여분의 기름을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다섯명은 나는 충분하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그래서 걱정하지 않았고, 그래서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기억해야 합니다. 그 열명 모두 그 잔치에 초대되었다는 사실. 그 신랑이 그들 모두를 초대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럴 만 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신랑이 그들을 부른 것입니다. 그리고 열명 모두 거기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다섯은 그 초대에 나는 부족하다 하여 미리 준비했고, 나머지 다섯은 나는 충분하다 하여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초대받은 사람은 많으나, 선택받은 사람은 적습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솔직해야 합니다. 내가 부족하다는 것, 내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 내 믿음 생활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또한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나 숨지 않고 도망가지 않아야 합니다. 나의 그 부족함이 하루 이틀, 한 두 시간의 신앙 행위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 또한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루하루 그걸 채워 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원하시고 바라시는 우리의 신앙의 모습입니다.

지금 처녀들이 초대를 받자마자 늦지 않게 거기 램프를 들고 찾아오고, 게다가 여분의 기름을 담은 기름병도 챙기고, 그렇게 기다리다 지쳐 고단해 그만 잠이 들고, 그러나 오신다는 소식에 깨어 그 신랑을 맞는 것. 그 모든 것들은 바로 우리의 신앙의 일상, 신앙 생활, 신앙의 삶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신앙이 그저 한 번 두 번, 하루 이틀, 일년 이년 그 기간에 이루어지는, 얼마의 기름을 끌어 모아 가득 채운 램프를 들고 앞에 한 번 서고 마는 그런 신앙의 행위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생활이 된 신앙, 일상이 된 신앙, 그래서 삶이 된 신앙이어야 합니다. 주님께로부터 보고 듣고 배우고 또한 받은 것을 내 삶으로 살아내는 것, 주님을 내가 살아내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복이 있는 신앙입니다.

 

“3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로하실 것이다. 5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 7 자비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비롭게 대하실 것이다. 8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9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 12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너희보다 먼저 온 예언자들도 이와 같이 박해를 받았다." (마태복음서 5:3-12)

 

몸이, 마음이, 영이 가난한 사람들을 내가 가진 것을 나누고 돌보고 돕고 섬기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늘 나라를 맛보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 슬픔 속에 있는 사람을 하나님의 위로를 먼저 받은 내가 위로하는 것입니다. 주님처럼 나도 낮아져,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높게 여겨 섬기는 것입니다. 정의가 없다, 세상이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버렸다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고, 하나님의 의를 알려주고, 하나님의 의를 내가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 그 베푸시는 사랑을 내가 실천하는 것입니다. 딴 맘 딴 생각을 품지 않고, 이것은 이것이다 저것은 저것이다 솔직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듯 서로에게 꾸밈이 없이 내 것을 그대로 보여주며 서로의 앞에 서는 것입니다. 그러니 싸울 일도 없고, 나와 싸우겠다는 사람도 없으니, 평화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런 나를 사람들은 불편하다 할 것이고 귀찮아 할 것이고, 나아가 나를 못살게 굴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니, 그것 때문에 더 나를 못살게 굴지도 모릅니다. 나에게 욕도 험담도 비난도 할 것이고, 나에게 손해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종말의 때, 주님께서 오실 그때 내가 받을 상이 너무 크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오시는 그 날과 그 시각을 정확히 알아 그 타이밍에 맞추어 내가 주님께서 하라 하시는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일을 하고 있는 그 와중에 그 날과 그 시각이 오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내리는 그 첫눈은, 첫눈이 온 줄도 모른 채 주님께서 나에게 주시고 나에게 기대하시는 하나님 사랑이웃 사랑’, 그 내 몫의 일을 내 몫의 일상에서 살아내고, 내 몫의 삶, 그 사랑의 삶을 열심히 꾸려갈 때, 문득 창문을 열고 보니, 문득 내 방문을 열고 보니, 거기 밤새 내린 첫눈으로 새하얗게 변한 세상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 누구도 밟지 않은 눈밭에 내 발 찍으며 주님께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에덴 동산에서 어긋난 그 하나님과 나의 그 첫사랑이 마침내 이루어지는 날. 그것이 바로 우리가 꿈꾸며, 또한 이루어질 현실로 기다리는 첫눈이 오는 날입니다.  그 첫눈과 함께 오시는 주님은 그때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46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하고 있는 그 종은 복이 있다. 47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마태복음서 24:46-47)

 

돌아온 주인은 그 종이 충실하게 주인의 명령을 따른 것을 보고, 더 큰 것, 자기 모든 재산을 맡깁니다. 그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 나라를 맡기는 것, 내가 너에게 내 모든 것을 준다는 것, 바로 아버지의 나라를 너의 것으로 너의 나라로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이고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기대하시는 것이고, 이 때가 바로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충실한 종에게 종말의 그 날과 그 때는 내 삶의 끝이 아니라 내 삶의 새로운 시작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종말의 날과 종말의 때가 재앙의 날과 때가 아니라, 복의 날이며 복의 때인 이유입니다.

 

  1.  

얼음으로 혹은 불로 멸망하는 세상을 그려내는 할리우드 영화로 겁먹은 채, 나 혼자, 내 가족만 살겠다, 섬을 사고 산을 사고 사막을 사고, 거기 깊은 곳에 벙커를 짓고, 노아의 방주라 이름 짓는 것이 종말의 때를 기다리는 그리스도인들의 태도가 아닙니다. 여기 지구 이 땅 실컷 썼으니 이제 다른 행성으로 눈을 돌리자, 거기 가서 또 멋지게 살아보자, 그렇게 외계로 눈을 돌리는 것이 종말의 때를 준비하는 그리스도인들의 태도가 아닙니다. 그건 첫눈과 함께 오실 그 첫사랑의 사람, 그리스도 예수와 나의 사랑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기다리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지난 2천년간 지속해서 종말을 얘기하는 것, 종말의 때를 얘기하는 것은 빙하시대, 추운 겨울, 차가운 눈이 무섭고 공포스러워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춥고 차갑게 변해가는 세상에서 나를 따뜻하게 해 줄 그 사랑, 그 사랑의 사람, 그리스도 예수를 그리워하고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미 십자가를 통해 내가 받은 그 사랑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을 기억하고 또한 그 사랑이 완전히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며, 여기 이 땅에서 그 사랑의 온기를 유지하며, 또한 서로의 온기로 서로를 따뜻하게 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사랑의 주님이 다시 오실 때를 기다리며 여기 종말로 향해 가는 때를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고 신앙의 삶입니다.

 

남한테 비굴하게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된다고

아버지는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첫눈이 내릴 때

첫눈한테는 무릎을 꿇어도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날

첫눈 오는 날

길 잃어 쓰러진 강아지를 품에 안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 정호승의 <첫눈 오는 날>

 

세상에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아프고 슬프고 힘 없고 약한 이들을 품에 안기 위해 무릎을 꿇는 것. 그리고 첫눈으로 오시는 주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 그것이 신앙입니다. 길 잃어 쓰러진 강아지, 그리고 목자 없는 양처럼 길 잃은 양으로 사는 이웃을 나의 품에 품는 것이 우리의 신앙 생활입니다.

 

첫눈 오는 날 만나자

. . .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첫눈을 기다린다.

첫눈을 기다리는 사람들만이

첫눈 같은 세상이 오기를 기다린다

아직도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약속하는 사람들 때문에

첫눈은 내린다

세상에 눈이 내린다는 것과

눈 내리는 거리를 걸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큰 축복인가

 

첫눈 오는 날 만나자

. . .

- 정호승의 시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중에서

 

첫눈처럼 오는 세상의 끝 날, 여러분과 저 만나면 좋겠습니다. 함께 만나 눈길 함께 걸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한여름에도 첫눈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첫눈을 기다리는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랑을 받아본 사람들이고, 지금 그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고, 그 사랑을 지금보다 더 받고 싶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아예 그 사랑 안에 영원히 머물러 있고 싶은 사람들입니다. 곁에 있지만 여전히 그 사랑 부족하고 그리워 그 사랑을 기다리는 사람들인 우리는 주님으로 받은 그 사랑을 또한 이웃과 나누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첫눈이 오는 날, 주님의 사랑으로 다시 그리고 영원히 채워지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첫눈이 오는 날 만날 사람들입니다.

 

덥고 더운 여름. 여기를 보아도 저기를 보아도 정말 더운 소식과 더운 이야기들만 잔뜩인 세상입니다. 그러나 오늘 여기를 ‘7월의 크리스마스’, ‘8월의 크리스마스로 사십시오. 종말의 때는 첫눈이 내리는 날이고, 우리가 기다리는 사랑의 주님은 그 첫눈과 함께 오실 것입니다. 오셔서 우리와의 그 첫사랑을 이제 완전히 이루실 것입니다. 그 끝 날에 내릴 첫눈과 함께 첫사랑을 이루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