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에 내린 재앙 이야기가 그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 끝이 누구에게는 정말 마지막이 될 것이고, 그러나 누구에게는 새로운 시작이 될 것입니다. 이집트 파라오에게는 마지막이 될 것이고, 모세와 이스라엘에게는 새로운 시작이 될 것입니다. 모세가 이쪽 편에 서 있고, 저쪽 편에 파라오가 서 있습니다. 뚜렷한 구별이 생겼습니다.
"4 그래서 모세가 바로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한밤중에 이집트 사람 가운데로 지나갈 것이니, 5 이집트 땅에 있는 처음 난 것이 모두 죽을 것이다. 임금 자리에 앉은 바로의 맏아들을 비롯하여, 맷돌질하는 몸종의 맏아들과 모든 짐승의 맏배가 다 죽을 것이다. 6 이집트 온 땅에서, 이제까지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큰 곡성이 들릴 것이다. 7 그러나 이집트의 개마저 이스라엘 자손을 보고서는 짖지 않을 것이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을 보고서도 짖지 않을 것이다. 이는, 나 주가 이집트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을 구별하였다는 것을 너희에게 알리려는 것이다.'" (출애굽기 11:4-7)
그 가운데를 가르시는 분, 그 둘을 구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그 구별은 우리 사람의 생각하는 대로 누가 누구보다 더 낫다, 누가 누구보다 더 옳다, 누가 누구보다 더 잘났다 잘했다 하는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 구별은 오직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창세기에서 시작하여 출애굽기를 거쳐 말라기서에 이르는 모든 구약시대, 그리고 신약시대를 지나 지금까지 이어지는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그것을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거기 우리 사람에게 주권자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하나입니다.
“무에서 세상을 창조한 나, 스스로가 원인이며 결과이며 또한 과정인 나, 비롯함이 없는 스스로 존재하는 나, ‘시작’이며 ‘마침’인 나, 하나님 외 다른 신은 없다. 그러니 너희의 주 여호와 하나님인 나를 믿어라. 그러면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될 것이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며, 나의 백성으로 영원히 살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별이고 선택이고 구원이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니,
“‘대답 없는 너’로 더 이상 있지 말아라, 눈을 떠 너의 지금 있는 곳을 살펴라, 귀를 열어 나의 말을 들어라, 마음을 열어 나를 보아라. 이제 나에게 대답하여라.”
‘예’ 그 한 마디가 어렵고, 그 ‘예’를 살아가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예’ 하고 대답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무엇일까요? 나는 제대로 된 믿음을 갖고 있고, 제대로 그 믿음을 살고 있을까? 여전히 우리 신앙인이 거듭 씨름하는 질문이고 또한 살아가는 질문입니다. 그 옳은 답을 내리겠다, 정답을 맞추겠다 해도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는, 이거다 싶으면 사라지는 아침 안개 같습니다. 그래서 계속 그 안개 속을 걷고 또 살아가는 질문입니다. 매년 어김 없이 사순절은 지나 부활절은 오고, 그 부활을 정답으로 알고 그 부활의 삶을 산다고 하면서 어느새 길을 잃고 맙니다. 그러다 보면 내 안에 점점 희미해진 주님을 기다리겠다 하며 대림절은 오고 다시 성탄절을 맞습니다. 그래 새로운 시작이다 하다가 보니 다시 어느새 예전으로 돌아가는 듯 보이는 나. 그런 나를 참아 내치지 못해 그런 나를 위해 오신 주님, 또 다시 그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주님을 기억하고 묵상하며, 또 다시 부활절을 맞는 우리입니다.
믿음이란 뭘까, 어떻게 신앙을 하고 어떻게 신앙을 살까, 한 번으로 끝나는 질문이면 좋겠는데. 그래서 한 번 내린 답을 정답으로 알고 살아가면 편할 텐데 . . . 그러지 못해 거듭 묻고 거듭 점검하고 씨름하며, 힘들고 어렵게 그 답을 완전하진 않지만 내 나름의 답을 찾아 신앙을 하고 신앙을 살고. 그러나 그것이 정답이 아님을 알고, 그래서 그 답을 조심스럽게 살아내는 것. 그러면서 내가 틀릴 수 있다, 아니 틀렸다 겸손히 걷는 것, 그것이 신앙의 길이 아닐까요.
여기 두 사람이 보입니다. 모세와 파라오입니다.
"3 주님께서 이집트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호감을 가지게 하시고, 또 이집트 땅에서 바로의 신하와 백성이 이 사람 모세를 아주 위대한 인물로 여기게 하셨다.
10 모세와 아론이 바로 앞에서 이 모든 이적을 행하였다. 그러나 주님께서 바로의 고집을 꺾지 않으셨으므로, 바로가 그 땅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내보내지 않았다." (출애굽기 11:3, 10)
이집트 파라오의 신하와 백성이 이스라엘의 모세를 위대한 사람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정작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그들은 조금씩 반감을 갖습니다.
"18 그러므로 내일 이맘때에 내가 매우 큰 우박을 퍼부을 것이니, 그처럼 큰 우박은 이집트에 나라가 생긴 때로부터 이제까지 한 번도 내린 적이 없다. 19 그러니 이제 너는 사람을 보내어, 너의 집짐승과 들에 있는 모든 것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켜라.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들에 남아 있는 사람이나 짐승은, 모두 쏟아지는 우박에 맞아 죽을 것이다.'" 20 바로의 신하들 가운데서 주님의 말씀을 두려워한 사람들은 자기의 종들과 집짐승들을 집 안으로 피하게 하였다. 21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않는 사람은 자기의 종과 집짐승을 들에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출애굽기 9:18-21)
파라오의 신하들 중 일부가 이제 모세의 말을 귀담아 듣습니다. 모세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이집트 사람들이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발 더 나아가는 이집트 사람들입니다.
"4 네가 나의 백성을 보내기를 거절하면, 나는 내일 너의 영토 안으로 메뚜기 떼가 들어가게 할 것이다. 5 그것들이 땅의 표면을 덮어서, 땅이 보이지 않게 될 것이며, 우박의 피해를 입지 않고 남아 있는 것들을 먹어 치우되, 들에서 자라는 나무들까지 모두 먹어 치울 것이다. 6 너의 궁궐과 너의 모든 신하의 집과 이집트의 모든 사람의 집이 메뚜기로 가득 찰 것이다. . .'" 그리고 나서, 모세는 발길을 돌려 바로에게서 나왔다. 7 바로의 신하들이 바로에게 말하였다. "언제까지 이 사람이, 우리를 망하게 하는 함정이 되어야 합니까? 이 사람들을 내보내서 그들의 주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심이 좋을 듯합니다. 임금님께서는 아직도 이집트가 망한 것을 모르고 계십니까?" (출애굽기 10:4-7)
“저들 히브리 노예들이 섬기는 그들의 주 하나님이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그만 저들이 바라는 대로 해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러다가는 우리가 다 죽게 생겼습니다. 왕께서도 고집 그만 부리시고, 그냥 저들이 해달라는 대로 해주시죠 . . .”
내부의 균열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의 왕 파라오는 고집을 부립니다. 나는 위대한 제국 이집트의 존엄한 파라오다, 나는 누구의 말을 듣지 않는다, 너희 모두는 내 말을 들어야 한다, 나는 왕이고 신이다, 나는 위대하다, 하는 이집트 파라오에게 모세는 그저 히브리 노예들의 지도자일 뿐입니다. 광야에서 양을 치던 목자일 뿐입니다. 운이 좋아 왕궁에서 얼마 동안 살았던 그러나 여전히 히브리 노예 태생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가 믿는 신은 자기를 신으로 섬기는 이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는 무책임한 신, 무력한 신, 허약한 신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집트의 위대함이 파라오인 나의 위대함이 이집트의 신 나 파라오의 그 위대함을 증명한다, 그것이 이집트 파라오의 생각일 것입니다.
이 모든 재앙의 시작은 여기입니다.
"1 그 뒤에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말하였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나의 절기를 지켜야 한다' 하셨습니다." 2 그러나 바로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 주가 누구인데, 나더러 그의 말을 듣고서, 이스라엘을 보내라는 것이냐? 나는 주를 알지도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도 않겠다." (출애굽기 5:1-2)
“그 하나님이 도대체 누구냐? 누구인데 나더러 그의 말을 들어야 하고 또 따라야 한다는 것이냐? 너희가 믿는다고 섬긴다고 하는 그 하나님을 나는 모른다.”
그 파라오에게 하나님께서 답하십니다.
"6:6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라. '나는 주다. 나는 이집트 사람들이 너희를 강제로 부리지 못하게 거기에서 너희를 이끌어 내고, 그 종살이에서 너희를 건지고, 나의 팔을 펴서 큰 심판을 내리면서, 너희를 구하여 내겠다. 7 그래서 너희를 나의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내가 주 곧 너희를 이집트 사람의 강제노동에서 이끌어 낸 너희의 하나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7:5 내가 손을 들어 이집트를 치고, 그들 가운데서 이스라엘 자손을 이끌어 낼 때에, 이집트 사람들은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6 모세와 아론은 주님께서 자기들에게 명하신 대로 하였다." (출애굽기 6:6-7; 7:5-6)
나를 모른다면 내가 알려주겠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에게 내가 직접 알려주겠다. 단지 이스라엘에게만 이집트에게만 내가 누구인지를 알려주시는 것이 아니라, 주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온 세상이 알게 하겠다. 이것이 작게는 이집트에 재앙이 내린 이유이고, 그리고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끌어내신 이유이고, 크게는 이스라엘을 통해 이 땅의 모든 나라와 민족을 구원하시겠다 작정하신 나서신 이유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누구인가’를 아는 것, 그것이 믿음의 처음이고 믿음의 끝이고 또한 믿음의 그 사이입니다.
"29 모세가 그에게 말하였다. "내가 이 성을 나가는 대로, 나의 손을 들어서 주님께 빌겠습니다. 그러면 천둥소리가 그치고, 우박이 더 이상 내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온 세상이 우리 주님의 것임을 임금님께 가르치려는 것입니다. 30 그래도 임금님과 임금님의 신하들이 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9:29-30)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무지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무지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모른다, 알고 싶지 않다, 알아야 할 필요도 이유도 느끼지 못한다, . . . 나는 하나님을 (조금, 대충, 많이) 안다 . . . 갖가지 무지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그것이 참 지식이고 그것이 참 신앙입니다. 그 하나님이 정말 누구신지 안다면 나는 하나님 앞에 겸손할 수 밖에 없고, 그 하나님에게서 멀어졌던 그 하나님을 몰랐던 지난 나의 모습을 회개하며 자비와 용서를 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제 나 그 하나님을 알게 하시니 그 은혜에 감사합니다, 그 앎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믿음은 복음을 만나고 듣는 것에서 나오고, 그 들음은 알고자 하는 마음에서 나오고, 그 충분치 않지만 그 어느 만큼의 앎이 믿음으로 이어져 세례를 통해 정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향한 믿음의 여정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왜 모세를 이집트 사람들이 위대한 인물로 여겼을까요? 그가 보여준 그 이적들 때문일까요? 그런데 정말 사람의 위대함이란 정말 그런 남들이 하지 못하는 어떤 능력을 소유한 사람, 기적을 일으킨 사람을 말할까요? 물론 이집트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그건 모세의 능력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렇다면 인간의 참 위대성, 그리고 참 존엄성(dignity)은 어디서 나올까요?
113 생각하는 갈대
나의 존엄성을 찾아야 할 곳은 공간이 아니라 사유의 규제에서이다. 땅을 소유하는 것으로 내가 더 많은 것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니다. 우주는 공간으로 나를 에워싸고, 하나의 점처럼 나를 삼켜 버린다. 나는 사유로 우주를 이해한다. (블레즈 파스칼의 <팡세> 중에서)
땅을 소유한 것, 더 많은 것을 갖고 있는 것, 더 높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과 위대성은 나를 에워싼 우주, 그 속에 하나의 점으로 있는 나를 아는 것, 그리고 그 우주를 내가 아는 것입니다. 결국 그 우주 너머에 존재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것, 나는 그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인간의 존엄성과 위대성입니다.
114 인간의 위대함은 자신이 비참하다는 것을 아는 데에서 위대하다. 나무는 자신의 비참함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자신이 비참하다는 것을 아는 것은 비참한 일이지만, 인간이 비참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위대하다.
117 인간의 위대함
인간의 위대함은 너무나 명백해서 인간 자신의 비참 속에서조차 그 위대함이 드러난다. 왜냐하면 동물에게 속하는 본성을 우리는 비참이라 부르기 때문이다. 이로써 우리는 인간의 본성이 오늘날 동물의 본성과 유사해져서 이전의 자신의 것이었던 더 나은 본성에서 추락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블레즈 파스칼의 <팡세> 중에서)
그런데 왜 인간의 비참을 아는 것이 역설적이게도 인간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증거가 될까 하는 것입니다.
"1:26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그리고 그가,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 사는 온갖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베푸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 하셨다.
2:19 주 하나님이 들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를 흙으로 빚어서 만드시고, 그 사람에게로 이끌고 오셔서, 그 사람이 그것들을 무엇이라고 하는지를 보셨다. 그 사람이 살아 있는 동물 하나하나를 이르는 것이 그대로 동물들의 이름이 되었다. 20 그 사람이 모든 집짐승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다." (창세기 1:26-28; 2:19-20)
그것은 내가 본래 동물의 본성을 소유하지 않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어 하나님의 세계를 하나님으로부터 위탁을 받아 돌보고 관리하고 감독하는 그래서 하나님의 협력자였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창조주 하나님 곁에 있던 그 위대하고 존엄한 위치, 그 본성에서 인간이 추락하고 타락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내가 다시 그 본래의 모습을 찾아 그 모습을 회복해야 할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 그것이 인간의 위대함이라는 것입니다. 그 위대함에서 추락한 인간의 비참을 깨닫는 것, 그래서 그것이 인간의 위대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 인간은 다시 존엄하고 위대한 하나님의 협력자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 . . 변함없는 신앙의 두 가지 진실 . . .
하나는 인간이 창조의 상태에서는, 아니면 은총의 상태에서는 모든 자연 위 높은 곳에 위치했고, 하나님과 비슷하게 만들어진 신의 협력자였다는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죄와 타락 상태의 인간은 위의 상태에서 추락하여 짐승과 비슷하게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 . .
. . . 인간은 은총을 통해 하나님과 비슷하게 만들어졌고 신의 협력자였으며, 은총 없이는 야수와 비슷하다는 점이 분명한 것 같다. (블레즈 파스칼의 <팡세> 중에서)
인간이 처한 비참을 아는 것은 인간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지만, 그러나 그 외면하고 부정하고 싶은 현실에 대한 깨달음이 곧 인간을 다시 위대하고 존엄하게 하는 그 길로 이끄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바로 이런 깨달음, 인간에 대한 참 지식과 하나님에 대한 참 지식이 우리를 짐승의 세계가 아닌 창조의 상태 그리고 은총의 상태에 있는 참 인간의 세계로 회복시킬 수 있는 그 시작점이 됩니다. 사실 그 깨달음이 바로 복음을 듣고 그 복음을 내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거기서 믿음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깨달음과 믿음이 자라고 또한 그 깨달음과 믿음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 신앙인의 삶입니다.
나의 원래 있던 곳, 내가 본래 속한 곳, 거기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런 지식과 깨달음이 그냥 저절로 나에게 오지 않습니다. 내가 쉽게 움켜쥘 수 없습니다. 우리는 거기서 너무 멀리 떨어져 나와 너무 오랫동안 비참 속에 살았기에 그 기억이 너무 희미합니다. 우리 가슴팍에 새겨진 양심, 혹은 마음의 율법을 따르기엔 우리가 너무 고약할 정도로 마음이 완악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무지함과 하나님에 대한 무지와 완악함이 바로 여기 이집트 파라오의 무지와 완악함입니다. ‘나는 주 하나님을 모른다. 나는 너희 주 하나님이 두렵지 않다’ 하는 그의 굳고 딱딱한 마음이 이끄는 길, 그것이 파라오가 선택한 길입니다. 그런데 파라오 역시 할 말은 있습니다. 출애굽기 11:10입니다.
10 모세와 아론이 바로 앞에서 이 모든 이적을 행하였다. 그러나 주님께서 바로의 고집을 꺾지 않으셨으므로, 바로가 그 땅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내보내지 않았다. (새번역)
10 모세와 아론이 이 모든 기적을 바로 앞에서 행하였으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자손을 그 나라에서 보내지 아니하였더라(개역개정)
10 모세와 아론은 파라오 앞에서 온갖 놀라운 일을 해보였다. 그러나 야훼께서 파라오에게 고집을 부리게 하셨으므로 그는 백성을 그의 땅에서 내보내지 않았다. (공동번역)
파라오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내가 그런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그렇게 하도록 만드셨다. 하나님께서 나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고, 계속해서 고집을 부리도록 만드셨다. 나의 고집을 꺾지 않으셨다.”
누구는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파라오는 원래부터 그렇게 하도록 되어 있었다. 파라오는 그렇게 하도록 이미 누군가에게 프로그래밍이 되어 있었다. 모든 것은 신이 계획했고, 따라서 파라오는 그저 도구였을 뿐이다. 그리고 나 역시 그렇다. 내 잘못이 아니다.”
과연 그럴까요? 파라오는 무죄일까요? 나는 무죄일까요?
"9:33 모세는 바로 앞을 떠나서, 성 바깥으로 나갔다. 그가 주님께 손을 들어 기도하니, 천둥소리와 우박이 그치고, 땅에는 비가 더 내리지는 않았다. 34 그러나 바로는, 비와 우박과 천둥소리가 그친 것을 보고서도, 다시 죄를 지었다. 그와 그의 신하들이 또 고집을 부렸다. 35 주님께서 모세를 시켜 말씀하신 대로, 바로는 고집을 부리며 이스라엘 자손을 내보내지 않았다.
10:1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바로에게 가거라. 그와 그 신하들이 고집을 부리게 한 것은 나다. 이것은 내가, 그들이 보는 앞에서 나의 온갖 이적을 보여 주려고 그렇게 한 것이다." (출애굽기 9:33-35; 10:1)
파라오를 비롯한 그의 신하들이 하나님께 대적한 것, 그 고집을 부린 것은 그들이 정한 선택이었습니다. 그리고 여기 하나님께서 그들이 그런 완악한 마음을 고집하게 만드신 것은 그들의 선택 그리고 그 결과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이런 저런 선택에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좌우되고 휘청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뜻과 목적과 계획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선택 그리고 그로 인해 나타난 결과, 그 모든 것을 통해 세상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큰 뜻, 큰 계획, 큰 목적, 큰 그림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흩어짐은 없다는 것입니다.
"1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결정은 주님께서 하신다. 2 사람의 행위는 자기 눈에는 모두 깨끗하게 보이나, 주님께서는 속마음을 꿰뚫어 보신다. 3 네가 하는 일을 주님께 맡기면,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 4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그 쓰임에 알맞게 만드셨으니, 악인은 재앙의 날에 쓰일 것이다." (잠언 16:1-4)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그 쓰임에 맞게 창조하셨습니다. 심지어 악인 또한 그 쓰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파라오 입장에서는, 악인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억울한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아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인간의 자유의지 그리고 자유의지에서 비롯된 우리의 선택에 대한 우리 인간의 책임. 이 두 가지가 함께 존재한다는 우리 사람의 생각과 논리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 신비, 그리고 넘어설 수 없는 우리 인간의 한계를 우리는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14 그러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불공평하신 분이라는 말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15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긍휼히 여길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사람을 불쌍히 여기겠다" 하셨습니다. 16 그러므로 그것은 사람의 의지나 노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에 달려 있습니다. 17 그래서 성경에 바로를 두고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일을 하려고 너를 세웠다.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나타내고, 내 이름을 온 땅에 전파하게 하려는 것이다" 하셨습니다. 18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시고자 하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고, 완악하게 하시고자 하는 사람을 완악하게 하십니다. 19 그러면 그대는 내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책망하시는가? 누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수 있다는 말인가?" 20 오, 사람아, 그대가 무엇이기에 하나님께 감히 말대답을 합니까? 만들어진 것이 만드신 분에게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하고 말할 수 있습니까? 21 토기장이에게, 흙 한 덩이를 둘로 나누어서, 하나는 귀한 데 쓸 그릇을 만들고, 하나는 천한 데 쓸 그릇을 만들 권리가 없겠습니까?" (로마서 9:14-21)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리고 자녀로 사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내가 자발적으로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이삭과 야곱과 요셉, 그리고 모세를 택하신 주권자 하나님께서 나를 또한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믿음은 주권자이시며 토기장이신 하나님의 손에 나를 전적으로 맡기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 주권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그런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믿고 나를 맡기는 것입니다. 인간의 위대함은 거기서 나옵니다. 나의 소유가 아니라 내가 이룬 것이 아니라 나의 약함, 나의 비천함을 알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추락과 타락, 그 비천함 속으로 오신 주님 앞에 내가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주님의 자비를 구하고 용서를 구하고 은혜를 구하고 구원을 구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기쁨>이라는 지난 부활절 다음 날 선종하신 프란체스코 교황의 현대 세계의 복음 선포에 관한 권고 앞부분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저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어디에 있든 바로 지금 이 순간 새롭게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만나도록,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그분과 만나려는 마음, 날마다 끊임없이 그분을 찾으려는 열린 마음을 가지도록 권고합니다. 그 누구도 이러한 초대가 자신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져다주시는 기쁨에서 배제된 사람은 아무도 없기”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길로 나서는 이들을 실망시키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우리는 그분께서 언제나 그곳에,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심을 깨닫게 됩니다. 지금이 바로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드릴 때입니다. “주님, 제가 잘못 생각해 왔습니다. 저는 수없이 주님의 사랑에서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이제 여기에서 주님과 계약을 새롭게 맺고자 합니다. 저는 주님이 필요합니다. 주님, 저를 다시 구원하여 주소서. 구원하시는 주님의 품 안에서 다시 한 번 저를 받아 주소서.” 우리가 길을 잃을 때마다 주님께 돌아갈 수 있다니 얼마나 좋습니까! . . .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시는 데에 결코 지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를 청하는 데에 지쳐 버립니다. . .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일흔일곱 번 용서하십니다. 그분께서는 매번 우리를 당신 어깨에 짊어지십니다. 이 무한하고 확고한 사랑으로 우리가 받은 존엄은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실망시키지 않으시고 언제나 우리의 기쁨을 되찾아 주시는 온유함으로, 우리가 고개를 들고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에서 도망가지 맙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포기하지 맙시다. 오직 그리스도의 생명만이 우리를 계속 앞으로 나아가도록 이끕니다!”
도망자로 유랑민으로 양을 치는 목자로 살았던 미디안 광야 40년, 인간의 비참 속에서, ‘내가 낯선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구나’ 하는 모세의 고백, ‘나는 누구를 구원하고 누구를 수렁 속에서 이끌어낼 만한 그런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하는 모세의 고백 속에서 우리는 모세의 위대함을 봅니다. 위대한 지도자, 위대한 스승, 위대한 신앙인의 모습은 자기의 비참과 비천에 대한 깨달음에서 나옵니다. 내가 비참하고 비천한 존재라는 것, 그 비참하고 비천한 나를 찾아오시고 또한 그런 나를 받아 주시는 주님, 감사합니다, 찬양합니다, 경배합니다, 그리고 나는 더욱 주님이 필요합니다 하며 무릎을 꿇는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그 주님을 거듭 찾고 거듭 만나고 그래서 함께 걷고 사는 것. 그것이 우리 신앙인들이 나누어야 할 복음의 기쁨입니다.
복음의 기쁨은 그래서 낮은 자의 기쁨, 낮아진 자의 기쁨, 그래서 부활의 기쁨입니다. 그리고 부활의 기쁨은 구원의 기쁨, 짐승의 본성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인간의 본성을 찾은 기쁨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기쁨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로 인한 기쁨이며, 그 기쁨은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기쁨입니다. 또한 성령 하나님과 함께 나와 걷고 뛰고 살아가는 기쁨입니다. 자아도취와 자기중심의 삶을 살아가며 나는 위대하다 억지를 부리는 파라오가 걷는 길은 왕들의 계곡이라고 불리는 왕들의 무덤으로 향한 길일 뿐입니다. 나의 비참과 비천을 알고 깨닫고 이제 짐승의 본성이 지배하는 길이 아닌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가는 참 인간의 길을 매 순간 선택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그리고 부활의 영광으로 빛나는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기쁨, 복음이 주는 평안과 위로, 복음이 주는 축복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